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더 나은 세상이 오려면 혼돈의 시간을 감내해야만 한다.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란 말을 떠올려본다. 루마니아 태생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책 제목이다. 밝음 앞에서 어둠이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탓에 '가장 어두운' 것일까.
혼란은 정도의 차이일 뿐 지속 저음처럼 사회질서를 흔든다. 시오랑은 "혼돈 상태를 부정하는 사람은 누구도 창조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혼돈과 질서는 함께하므로 양자를 이원적 대립물로 봐선 안 된다는 말이다. 기형도 시인이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고 했듯, 혼돈도 마찬가지다. 그 값이 오르내리는 것은 상황과 운에 따른다.
임계점을 넘지 않으면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시오랑은 말한다. "의식 속에 몸이 존재한다는 것은 삶이 병들었음을 의미한다"고. 맞다. 무릎, 위장, 심장, 눈알 등 몸의 일부가 내 의식 속에서 자각되고 있다면, 분명 몸에 이미 탈이 났다는 신호다. 병이 그렇듯 혼돈도 늘 만물의 중심에 있다. 표면화되지 않으면 그냥 모르고 산다. 그게 건강한 사회다.
『장자』라는 책에는 혼돈의 우화가 있다. 이 세상의 중앙에 '혼돈'이 있는데, 마침 남쪽 바다의 신 '숙'과 북쪽 바다의 신 '홀'이 중앙에 사는 혼돈의 땅에서 만났다. 이때 혼돈의 대접이 융숭했다. 숙과 홀이 감동을 받아, 혼돈에게 보답을 의논했다. "사람은 누구나 눈, 귀, 코, 입의 일곱 구멍이 있어서, 보고 듣고 먹고 숨 쉴 수 있다. 그런데 혼돈만이 그게 없다. 뚫어 주기로 하자!" 그래서 날마다 하나씩 구멍을 뚫어 나갔다. 이레째 되는 날,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세상 만물의 중앙에 있는 혼돈이, 숙과 홀의 활동 '시공간' 그리고 일곱 구멍이라는 '감각기관'의 출현으로 사라져 버렸다. 무슨 뜻인가. 손대지 않은 사물은 원래 혼돈이다. 하지만 언어와 감각의 분별로 인해 그 원상태는 망가진다.
어떤 의미에서 혼돈은 매력과 매혹이다. 잘 알 수 없는 어렴풋한 무언가가 사람의 시선을 더 끌 때가 있다. 엉망진창, 두루뭉술, 뒤죽박죽인 무언가가 오히려 더 아름다움을 때가 있다. 분명하고 질서 정연한 것이 못 보여 주는 야릇한 매력 말이다. 매일 먹는 소박한 집밥보다 무언가 잔뜩 넣어 화려해 보이는 외식에 더 끌린다.
말쑥한 정장 차림보다 찢어진, 너덜너덜한 청바지 차림에 더 끌린다. 매력과 매혹에 들어 있는 '매(魅)'라는 글자는 사람을 홀리는 도깨비의 뜻이다. 신비스럽고 요상한 것에 인간은 더 홀린다. 정상적인 것보다 '엉뚱한, 일그러진, 망가진, 흐트러진, 막막한' 것에 시선을 뺏긴다. 인간의 본성 속에는 이런 혼돈을 향한 정서가 있다.
사실 혼돈은 질서의 어머니이다. 새로운 질서를 예고하는 무질서, 다른 차원의 숨어 있는 질서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서 천지창조가 이루어지듯, 혼돈은 창조를 앞둔 보이지 않는, 질서 같지 않은 질서이다. 이런 무질서의 질서와 우리는 함께 있다.
일상의 사소한 시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언어로 호명되기 전에 '몸짓'만을 가진 무명의 '그 무엇'이 꽃이 되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어느 때가 '생일, 기념일'이 된다. 규정되지 않은 혼돈이 인간의 마음에 따라 '이것, 저것' '이때, 그때'로 변한다.
겉으로 보기에 혼돈은 무규정적, 불규칙적이다. 그러나 실제 그 나름의 규정과 규칙성을 가지고 있다. 도연명의 시에서 "그것을 표현하려 해도 할 말을 잊네"(欲辨已忘言)에서 알 수 있듯, 단지 적당한 언어를 얻지 못했을 뿐이다. 이렇게 혼돈은 전통적인 인과율이나 논증을 벗어난 듯하나, 새로운 인과율이나 논증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인식, 지각 너머에 숨어 있는 혼돈. 그것은 새로운 개념적 규정에 의해 '독특한, 색다른, 멋스러운' 존재로 찬양되기도 하고, '바보, 멍청이, 또라이'로 매도당하기도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음의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기억하라고 했다. "흙이 죽으면 물이 되고, 물이 죽으면 공기가 되고, 공기가 죽으면 불이 되고, 불이 죽으면 다시 흙으로 순환한다."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아낙사고라스도 "모든 것은 같다"고 했다. 두 사람에 따르면, '이게 저것이고, 저게 이것'이 된다.
결국 "그게 그거다". 당연히 이런 혼돈의 논리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혼돈의 입장을 거부한다. "A는 A이고, A 아닌 것(-A)은 A 아닌 것이다. 그것이 허물어지면 세상은 혼란에 빠질뿐더러, 세상 모든 게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형식 논리에서 보면, 사실 혼돈은 질서를 좀먹는 역겨운 존재다.
그러나 모든 물리적 사실은 '우리의 의식 밖'에 객관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 관찰하는 자의 '의식에 의해' 확정된다. 혼돈도 질서도 그렇다. 보는 자의 생각과 안목이 '어떤가'에 따라, 그 형식과 내용이 달라진다.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표현도 "해 지기 전이 가장 밝다"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생각과 안목에 따라 언어가 달라진다. 나의 언어가 가닿는 곳이 바로 나의 세상이다. 세상은 마음에 따라, 그 시선과 숨소리에 맞춰, 함께 살아 있다. 결국,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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