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조향래] '빈대떡 신사' 젤렌스키

입력 2025-03-10 18:47:19 수정 2025-03-10 19:45:33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릿집 문 앞에서 매를 맞는데, 왜 맞을까 왜 맞을까 원인은 한 가지 돈이 없어, 들어갈 땐 폼을 내어 들어가더니, 나올 적엔 돈이 없어 쩔쩔매다가, 뒷문으로 살금살금 도망치다가 매를 맞누나, 매를 맞는구나 으하하하 우습다…"

옛노래 '빈대떡 신사'는 형편도 안 되면서 비싼 요릿집을 들락거리다가 망신당하는 남자를 풍자한 노래로, 대중의 오랜 애창곡이었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며 노랫말은 탄식한다. 양복을 입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비싼 음식점에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는 얘기다.

'서양인의 옷'이라는 의미를 지닌 양복(洋服)이란 용어가 이 땅에 등장한 것은 1875년 무렵이다. 당시 관료이자 학자였던 박규수의 편지글에 양복이란 단어가 나타난 것이다. 최초로 양복을 입은 한국인은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가서 외교 활동을 했던 박영효로 짐작된다. 1883년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에 다녀온 민영익이 양복을 여러 벌 구입했다는 기록도 있다. 어설픈 양복 행색의 친일파 때문에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양복을 매국의 표상(表象)처럼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해외 유학생들이 멋진 양복을 입고 들어오면서 남성의 사회적 지위나 품격을 나타내는 신사복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광복 후에도 해외 동포의 귀국으로 양복 유행이 가속화되었다. 1955년부터 보편화된 신사복이 1960년대에는 농촌 지역으로 보급될 만큼 양복 수요가 급증했다. 글로벌 시대인 21세기의 명품 양복은 단순한 의복을 넘어 개성의 표현과 정체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17세기 유럽의 왕실에서 비롯된 양복은 사회적 지위와 문화적 배경을 시사했다. 최근 군복 스타일의 옷을 입고 미국 백악관을 방문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대한 이른바 '양복 조롱'에 대해 갑론을박이 무성하다. 백악관 입장에서는 도움을 청하러 오면서 정장(正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력하고 유익한 손님이었다면 전쟁 중인 나라 지도자의 패션으로 오히려 찬사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양복이 대수인가. 약소국의 설움인 것이다. 세상을 장사꾼 속내로만 주물럭거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안중에는 젤렌스키가 그저 양복도 안 입은 '빈대떡 신사'일 뿐이다.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joen040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