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들려주는 마케팅 이야기] 영화 속 배경을 찾아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입력 2024-12-27 15:55:02

하태길 겸임교수
하태길 겸임교수

어릴 적, 80년대의 주말은 오프닝 곡(Exodus Main Theme)이 흘러나오는 TV 속 '주말의 명화'와 함께였다. 화면 속 낯선 풍경들, 웅장한 성, 끝없이 펼쳐진 사막, 짙푸른 숲은 세상 밖으로 이어지는 창문 같았다. 언젠가 저곳에 가보면 어떨까 하는 작은 바람은 시간이 흘러 현실이 되었고, 스크린 너머 세상을 찾아 나섰다. 직접 마주한 그곳들은 영화 속 배경보다 훨씬 더 깊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느낄 수 없었던 공기와 냄새, 그리고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왔다. '주말의 명화' 속에서 품었던 작은 꿈은 그렇게 내 삶의 여정이 되고 있다.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영화 '아바타(Avatar)'의 배경이 되었던 판도라 행성의 이국적인 풍경은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 영감을 받았다. 층층이 쏟아지는 폭포, 맑고 푸른 호수,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대자연은 살아 숨 쉬는 듯한 오묘함을 자아낸다. 영화 속 나비족이 진지한 눈빛으로 "I see you"라고 인사할 때 플리트비체는 그들의 '아바타 블루(Avatar Blue)'로 가득해진다.

푸른 숲과 호수 위에 조용히 안개가 내려앉은 이른 아침, 새들의 지저귐과 물 흐르는 소리만 들려오는 가운데, 나무다리를 건너자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물결이 바위들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투명한 에메랄드빛 거울이 된 호수는 하늘을 비추며 하루를 열어준다.

호수 중심에는 작은 섬이 고요히 자리 잡고 있다. 울창한 숲이 호수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으며,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무엇인가 숨겨진 듯한 분위기가 감돈다. 다리를 건너 조금 더 걸어가자, 거대한 폭포가 눈앞에 펼쳐진다. 흩날리는 물보라에 떠오른 무지개는 동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숲으로 들어서면, 나무 사이로 비추는 햇살이 잃어버린 왕국의 숨겨진 장소를 향해 그림자를 만든다. 빽빽이 자란 이끼와 바위 틈새에 피어난 야생화들은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고 나뭇잎이 바람에게 정중히 안부를 전한다.

플리트비체는 계절마다 다양한 영화 속 장면에 영감을 준 곳으로 유명하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 봄이 찾아오면,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의 영화 '아바타'를 연상케 하는 생명력 넘치는 풍경이 펼쳐진다. 울창한 숲과 맑은 물줄기가 나무다리 사이로 경쾌하게 흐르는 여름이 되면, 피터 잭슨(Peter Jackson)의 영화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속 중세 판타지 세계로 들어간다. 가을에는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붉게 물든 숲이 앤드류 아담슨(Andrew Adamson)의 영화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 속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들이 옷장 문을 열고 들어간 고요하고 신비로운 숲처럼, 가을의 플리트비체는 깊고 잔잔한 평화를 선사한다. 특히 겨울에는 눈으로 뒤덮인 플리트비체가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Frozen)' 속 순백의 설원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모습으로 변한다.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풍경은 누구든 넋을 잃게 만든다.

플리트비체는 계절마다 다채로운 풍경 속에 이야기를 펼치며, 보는 이들에게 특별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순간이 한 편의 새로운 시나리오로 기록된다. 영화가 예술과 과학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주듯, 이는 마케팅 본질과도 닮아있다. 마케팅이 과학이자 동시에 예술인 것처럼.

◆중세의 도시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중세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을까? 두브로브니크는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도시다. 아드리아해를 마주한 이곳은 중세의 성곽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이 성곽은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속 수도 '킹스랜딩(King's Landing)'의 현실판이라 불리며, 영화팬이라면 한 번쯤은 찾고 싶은 장소다. 붉은 지붕들로 이어진 풍경, 그리고 성벽을 따라 펼쳐진 해안선은 킹스랜딩의 모습과 정확히 겹쳐진다. 티리온 라니스터(Tyrion Lannister)가 성벽 위에서 전투를 앞두고 신중하게 전략을 세우던 장면이 떠오르는 그곳.

성벽을 따라 걸으면, 돌바닥 위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고 병사들의 발걸음이 골목마다 울리는 듯하다. 블랙워터 베이(Blackwater Bay) 전투의 긴장감이 성벽 아래를 감싸고, 활을 당기는 병사들의 그림자가 아드리아의 희푸른 빛과 교차하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중세의 함성, 치열했던 순간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하지만 두브로브니크는 그저 중세의 도시로만 남아 있지 않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구시가지로 들어서면,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이 드러난다.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노천카페가 늘어선 스트라둔(Stradun) 대로가 펼쳐진다. 이곳은 고즈넉한 과거를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SF 영화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Star Wars: The Last Jedi)'에서는 가상의 도시로 나온다. 과거와 미래, 현실이 얽히고설켜 두브로브니크라는 상상의 무대를 만들어 낸다.

고개를 돌려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면, 과거의 긴박한 전투는 어느새 잊히고, 눈앞에 펼쳐진 평화로운 풍경이 나를 현실로 이끈다. 절벽 끝에 자리한 '부자 카페(Buza Cafe)'는 두브로브니크의 현재를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에서 탁 트인 푸른 아드리아 연안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여유롭게 커피를 마신다.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에도 등장해 유명해진 부자 카페는, 절벽 위에서 만나는 드넓은 바다 풍경으로 여행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선물한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두브로브니크의 매력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슬로베니아를 빛내는 블레드성과 섬. 하태길 겸임교수
슬로베니아를 빛내는 블레드성과 섬. 하태길 겸임교수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 섬 그리고 성

알프스산맥 아래 청정 호수, 그 위에 떠 있는 작은 블레드 섬, 그리고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블레드 성은 미처 알지 못했던 자연의 풍경이다. 이곳은 드라마 '흑기사'와 영화 '마법의 성(The Enchanted Castle)'의 배경이 되어, 관광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곳이다.

노 젓는 나룻배 플레트나(Pletna)를 타고 호수를 건너면, 블레드 섬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듯 서서히 다가온다. 섬에 도착하면 가파른 99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결혼식 장소로도 유명한 이곳은 신랑이 신부를 안고 쉼 없는 사랑을 증명하며 오르는 곳이다. 성모승천교회 소원의 종소리가 울리면, 절벽 위 블레드 성의 모습이 호수와 어우러져 섬 전체를 감싸준다.

블레드 섬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는 수 세기 동안 알프스의 눈동자를 지켜온 블레드 성이 기다리고 있다. 성채의 돌벽과 나무 기둥들 사이를 거닐다 보면, 중세 시대의 한 사람이 되고 만다. 아래로 내려다보면 바닷빛 호수에서 사람들이 여유롭게 수영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화 '마법의 성'의 주인공이 중요한 결심을 내리는 장소로 등장한 성채이다. '흑기사'에서도 이 호수의 선명한 풍경이 주요 장면으로 등장하는데, 물안개 사이로 섬과 성이 드러나는 모습은 마치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듯 신비롭게 다가온다.

블레드 성 카페에서 주문한 크렘슈니테가 나왔다. 블레드의 전통 디저트라니, 먹기도 전에 벌써 달콤하다. 하늘도 호수도 섬도 푸른 곳을 배경으로 부드러운 케이크는 여행의 고단한 시간을 잊게 만든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두브로브니크, 슬로베니아 블레드의 사례는 각각의 고유한 역사적·자연적 가치를 현대적인 마케팅 전략과 결합하여 방문객들에게 영화적 매력을 현실로 제공함으로써 감동과 충성도를 이끌어내는 성공적인 장소 마케팅의 사례로 볼 수 있다.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