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오래 살아남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입력 2024-12-12 15:54:19

[책]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 열린책들 펴냄

[책] 노인과 바다
[책] 노인과 바다

천명관의 소설 '고령화 가족'에서 오인모가 엄마 집으로 들어와 읽기 시작한 작가. 집안에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교차편집으로 소환하는 그 작가의 책, 엄마를 제외한 온 가족에게 멸시당하는 오한모가 민경이 팬티사건 이후 늘 옆에 끼고 다닌 소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서 혼자 낚시하는 노인이었고,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날이 이제 84일이었다. (중략) 돛은 여기저기 밀가루 부대로 기운 것이었는데, 그렇게 접어 놓으니 영원한 패배의 깃발처럼 보였다."(9쪽) 그런데도 노인은 굴하지 않는다. "모든 게 늙어보였으나 두 눈만은 그렇지 않았다. 두 눈은 바다와 똑같은 색깔이었고 쾌활한 불패의 기색이 감돌았다."(10쪽)

헤밍웨이를 읽을 때마다 내 자신에게 묻는다. 이 노인은 어떤 사람이기에 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오래전에 접었을 일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집요함의 동력은 무엇일까.

위대한 인물까지 갈 필요도 없다.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은 남보다 버티는 힘이(수완과 능력은 기본이고) 출중하다. 버티는 힘은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 둘 다를 말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이란 얼마간의 시간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지나야 해결되는 일이 있음을 깨닫는 건 이 때문. 그 시간을 견디는 힘의 총합이 곧 능력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가슴 속에 풀리지 않는 채로 있는 것에 대해 인내심을 갖고, 답을 찾으려 애쓰지 말라"고 말했다. 왜냐면 그 답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주어지지 않는 거니까. 결국 얼마간의 시간동안 어떤 일을 하느냐에 달렸고, 그 차이가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다.

오래 버틴다는 말은 단지 오랜 시간 살아남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괴감과 모멸적 시선이 기다리는 그릇된 신념에 의해, 또는 일순간 단맛에 취해 아련한 유혹에 넋을 빼앗기면서, 그런 방법을 감수하면서까지 오래 버티고 싶은 사람은 없을 터.

1970~80년대 '웃으면 복이 와요'와 '고전 유머극장'과 스탠딩 코미디 전성시대. 주연은 언제나 배삼룡, 서영춘, 구봉서였다. 조연은 이기동, 이순주, 임희춘 등. 거칠게 말하자면 송해는 조연이라기보다는 신-스틸러에 가까웠다. 그의 후배들 예컨대 남철, 남성남, 이용식, 배일집, 배연정 등이 활약할 때도 송해가 코미디언으로 비중 있는 연기를 한 기억은 없다. 그런데 송해는 마지막까지 남아 전설이 되었다. 선후배와 동료가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거나 현역에서 은퇴하여 대중의 기억에서 잊혔어도,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을 올라탄 마지막까지 현역이었다. 너무 늦게 찾아온 전성기를 나름의 방식으로 확고하게 오랫동안 붙들어둔 희극인. 철저한 자기관리로 오랫동안 버틴 자에게 주어진 가장 큰 영광을 획득한 사람, 그가 송해였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상어 떼에게 청새치를 내주고 작살과 무기도 잃은 채 뼈만 매달고 돌아왔을지언정 노인은 자문자답 끝에 당당하게 말한다. "아무것도 날 패배시키지 못했어." 그리고 큰 소리로 말한다. "단지 너무 멀리 나갔을 뿐"(112쪽)이라고.

오랫동안 살아남은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나 또한 오래도록 글 쓰는 삶을 살고 싶다. 당신이 소망하는 삶도 분명히 그리 될 것임을 믿는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