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지도자의 곤욕과 고난

입력 2024-11-10 18:44:53

김태진 논설위원
김태진 논설위원

중세 영국과 프랑스 왕이 할 일 중 하나는 백성들의 손을 만져 주는 것이었다. 백성들은 왕의 손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낫거나 에너지를 얻는다고 여겼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는 왕이 연주창(連珠瘡) 환자들을 만지느라 바쁘다는 장면도 있는데 손만 얹어도 치료되는 능력은 왕권의 정통성(正統性)으로 간주됐다. 영국 국왕 찰스 2세는 25년 동안 9만2천 명, 연평균 3천700명에게 손을 얹었다고 한다.

지난 3일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가 홍수 피해가 컸던 발렌시아주 파이포르타를 찾았다가 분노한 수재민들로부터 진흙 세례를 받았다. 수재민들은 "살인자들" "당장 꺼져라" 등 욕설도 내뱉었다. 그럼에도 국왕은 수재민들에게 손을 내밀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국왕이 현장을 방문하기 전 민심이 좋지 않다며 만류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국왕은 방문을 고집했다고 한다.

곤욕(困辱)이 주관적 감정이라면 고난(苦難)은 객관적 평가에 가깝다. 곤욕은 예상치 못해 멘탈이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봉변(逢變)에서 오지만, 고난은 고초가 예상됨에도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곤욕의 뒤에는 수치심이 남지만 고난의 뒤에는 '까임 방지권'이 생긴다. 수세에 몰린 위정자 일부는 달걀 세례 등 가벼운 테러를 호기(好機)로 삼기도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 개원식·시정연설 불참 관련 입장을 밝히면서 "특검법과 동행명령권 남발은 국회에 오지 말라는 것"이라 했다. 또 "국회가 그 시간만큼이라도 예의를 지켜 주면 열 번이라도 가겠다"고 했다. 최고 권력자에 맞선 걸 기개(氣槪) 넘치는 무용담으로 전하는 운동권 투사(鬪士)식 저항으로 피켓 시위를 벌이던 야당이 "사과하고 가라"며 고함친 기억이 선명할 것이다. 돌을 맞더라도 가겠다던 대통령이 참기 힘든 곤욕이겠지만 견디는 모습을 고난으로 읽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20년 전쯤이다. 집중호우로 물에 잠긴 마을을 찾아갔던 모 구청 부단체장은 주민들 앞에서 죄송하다고 했다. 배수펌프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가 온 탓이었지만 격분한 주민들은 그를 물속으로 떠밀었다. "주민 분노가 사그라질 때쯤 가지 그랬냐"고 하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물에 빠지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책임 있는 사람이 나서야 할 때가 있는데 그게 늦을수록 분노는 더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