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 김성일의 11대 종손…'영남 유림의 종장'으로 평가
명성황후 시해·단발령에 학문 뒤로하고 의병 이끌어
독립운동 이어간 서산학단…제자 70여명 독립유공 훈장
"경은 성인 학문의 시작이요 끝"이라며 젊은 시절부터 항상 깨어있는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해 '경'(敬) 공부를 중시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1899).
최근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들어선 '학봉역사문화공원'을 계기로 서산 김흥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학봉역사문화공원 교육관은 '서산재'로 이름 지어졌다.
서산은 학봉 김성일의 11대 종손이다. 한말 퇴계 학통을 잇는 경북 북부 지역 문화권의 핵심 지도자다. 위정척사론을 견지하고 안동 지역의 전기 의병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안동지역 독립운동의 첫 횃불을 든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서산 김흥락은 위로는 퇴계로부터 이어진 도학의 큰 물줄기를 계승하고, 아래로는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하나의 호수같은 존재로 평가받고 있다. '영남 유림의 종장', '경북 독립운동의 대부'로 인정받고 있다.
◆서구문물 배격, 성리학 발전에 전념
김흥락의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1827년 안동 금계마을 소복산 아래 중턱 종택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맹'(繼孟), 호는 '서산'(西山)이다.
김흥락은 구한말 개항기를 살다간 성리학자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서구 세력이 무력을 앞세워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양 사회에 강압적으로 통상을 강요하던 때였다.
조선 또한 일본의 강요로 문호를 개방해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가치관이 다른 서구 문명이 유입돼 사회는 극도로 혼란에 빠졌다.
이 시기에 태어난 김흥락은 여유있는 집안 환경으로 일찍부터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정재 류치명의 제자로 퇴계 학맥을 계승했다.
그는 만물을 공경하는 '경'(敬) 사상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그런 까닭에 그는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수양하고 퇴계의 성리학을 발전시키는 일에 전념했다.
그는 '예'(禮)를 바탕으로 '인의'(仁義)가 바로 선 전통적 가치 질서를 고수했다. 서구 문명을 철저히 배격한 그는 '조선책략'(朝鮮策略)과 '서유견문'(西遊見聞) 같은 책이 전해졌으나 단호하게 그 책들의 수령을 거부했다.
김흥락은 만년에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져 유교적 가치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1895년 69세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안동의진의 지휘장으로 나서게 된다.
그가 의병 지휘관으로 나섰다는 사실은 그가 평소에 신념으로 가졌던 예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인의와 도덕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동 독립운동의 대부 서산
서산은 안동지역 독립운동의 첫 횃불을 든 인물이다. 전기 안동의병 최고 지도자였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5일 삼계서원 통문, 같은 날 청계통문·경광서원 통문, 1월 16일 호계서원 통문을 발해 의병을 발의했다.
1월 17일 금계마을 뒤 봉정사에서 유림대표 회의를 열고 처음으로 거병을 결의했다. 다음날인 18일에는 안동유림의 중심인 호계서원에서 1천여명의 유림이 모여 유림대회를 열었다.
20일에는 안동 유림을 총동원해 1만여명의 유림이 모인 가운데 안동부 삼우당 앞뜰에서 의병조직을 위한 총회를 열고 의병 대장에 권세연을 추천, 선출해 제1차 안동의병을 출전시켰다.
봉정사 거병 결의 3일만에 1만여명의 유림을 총동원 할 수 있었던 것은 용의주도한 서산의 지휘와 '해야 할 일은 바람이 몰아치듯 즉시 실행하고, 번개처럼 빠르게 고친다'라는 '역행'을 가슴깊이 새겼던 '서산학단' 유생들이 바탕이 됐다.
서산이 당시 반포한 '창의격문'(倡義激文)은 임진왜란 당시 학봉선생이 영남지역 선비들에게 의병 봉기를 촉구하기 위해 반포한 격문인 '초유문'(招諭文)의 내용과 정신이 계승된 것이었다.
관군이 무너진 상황에서 임진왜란 극복의 원동력이 됐던 임진년 영남의병이 한말 항일의병의 뿌리임을 보여준 것이다.
이후 관군에 의해 의병진이 무너지자, 서산은 각 문중의 협조와 참여를 이끌어 내 반격을 준비했다. 이때 이중린의 예안의진, 박주상의 예천의진 등 반격 대열이 형성됐다.
안동의진이 다시 안동부에 입성해 전투력 강화를 위해 제2차 의병진을 구성하고, 대장에 김도화를 선출하고 서산 선생과 류도성이 지휘장을 맡았다.
이렇듯 서산 선생은 국가 존망의 위기를 맞아 병호시비의 종결을 위해 병파의 대표적 인물인 하회 류도성과 손잡고 함께 의병에 참여했다. 영남유림의 수백년 갈등 해소를 위한 병호보합의 초석을 놓기도 했다.
◆'보인계첩'과 '서산학단'
'보인계첩'(輔仁稧帖)은 서산 김흥락에게 배운 제자들의 명단이 적힌 문인록이다. 여기에는 705명이 수록돼 있지만, 제자들이 2천여명에 이르고, 선생의 3년 탈상에는 4천여명이 다녀간 것으로 전해진다.
문인론에 오른 제자들의 본관이 확인된 성씨는 110개 성씨에 이른다. 대부분 안동을 중심으로 북부지역 가문의 문인들이 많았다.
보인계첩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후대에 가서 서산학맥이 타 지역으로 퍼져간 사례도 있다. 전남 장성 출신으로 호남을 대표하는 한학자 변시연과 충북 옥천 출신 교육자 임창순으로 서산 학맥(서산 학단)이 닿아 있다.
제자들은 스승 서산으로부터 '학문은 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행을 위한 것'이라 배웠다. 일상에서 늘 깨어있는 의식과 마음 상태인 '경'에 의거해 배움을 추구하고 배움은 반드시 실천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죽고사는 갈림길인 의(義)와 리(利) 사이에서 의연히 의를 따르는 실천'을 요구했던 스승 서산의 가르침대로 제자들의 실천은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이어졌다.
제1차 안동의진을 시작으로 55년 대한독립운동사에서 서산학단의 독립운동은 줄기차게 계속됐다. 을미의병, 후기의병, 계몽운동, 만주 독립운동, 3·1운동, 임시정부 활동, 파리장서와 유림단의거, 의용단과 의열단, 광복군까지 광복 역사 곳곳에 스며 있다.
지금까지 서산학단 제자 70여명이 독립유공 훈장을 받았다. 이 가운데 대표적 인물은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백하 김대락, 기암 이중업, 공산 송준필, 해창 송기식 등이 있다.
특히, 종손인 서산의 영향을 받은 집안·지손들 가운데서도 17명이나 독립유공자가 배출됐다. 학봉선생의 방손인 내앞 의성김씨도 27명으로 한 집안에서 44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샘이다.
이렇듯 우리나라 대표적 독립운동가 가문의 중심에는 서산 선생이 우뚝 서 있다. 서산 김흥락 선생과 손자인 김용환 선생은 1995년 8월 15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아 조손 2대가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
댓글 많은 뉴스
한동훈 이틀 연속 '소신 정치' 선언에…여당 중진들 '무모한 관종정치'
비수도권 강타한 대출 규제…서울·수도권 집값 오를 동안 비수도권은 하락
[매일칼럼] 한동훈 방식은 필패한다
[조두진의 인사이드 정치] 열 일 하는 한동훈 대표에게 큰 상(賞)을 주자
한동훈, 당대표 취임 100일 "尹 정부 성공, 누구보다 바란다"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