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교제 폭력을 대하는 자세, 이제는 변해야 할 때

입력 2024-09-18 14:05:04 수정 2024-09-18 17:15:09

권기범 대구중부경찰서 여성청소년계 경사

권기범 대구중부경찰서 여성청소년계 경사
권기범 대구중부경찰서 여성청소년계 경사

지난 5월 서울 강남역 인근 옥상에서 서울 명문대 의대 재학생인 20대 남성이 여자 친구와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흉기를 준비해 계획적인 살인을 저질렀다.

지난 7월에는 1천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지닌 유명 유튜버의 성범죄 피해 사실 등이 드러나면서 연인 관계 또는 연인 관계였던 사이에서 발생한 중범죄가 세상에 지속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다.

과거 연인 간의 다툼은 속칭 '사랑싸움'이라며 남녀 간에 흔히 일어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는 온정적 인식과 관대한 정서가 존재했으나, 현재 발생하고 있는 교제 폭력의 빈도와 강도의 심각성은 도를 넘고 있다. 연인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반인권적 행동에 대한 해결 방안을 요구하는 사회적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실제로 강남에서 벌어진 교제 살인과 같은 교제 폭력의 발생 빈도는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다. 대구경찰청 교제 폭력 112신고 건수는 지난 2021년 4천48건, 2022년 4천291건, 2023년 4천964건으로 2021년 대비 지난해 22.6%나 증가했다. 범죄 유형으로는 지난 2023년 기준 폭행이 가장 많았고, 상해 및 협박이 뒤를 이었다.

교제 폭력 발생 빈도가 지속해서 증가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스토킹과 가정폭력보다 처음 신고 수위가 다소 낮고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교제 폭력 첫 신고는 단순 말다툼 또는 가벼운 접촉 등 경미한 정도로 시작된다. 그러다 보니 다른 위험성이 즉각적으로 확인되지 않으며 화해하고 경찰관 개입을 거부할 시 선제적으로 보호 조치를 할 수 있을 만한 방법이 없다. 그러나 다툼을 반복하며 신고 빈도가 증가하고, 교제 폭력의 정도와 크기가 더욱 커지다 결국 폭언과 폭행, 상해 등 연인 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하는 일이 잦다.

둘째, 주로 발생하는 폭행이 반의사불벌죄인 점이다. 피해 사실에 따라 반의사불벌죄가 아닌 경우도 있지만, 앞서 범죄 유형에서도 확인했듯 폭행으로 접수되는 사건이 다수이기에 가해자의 회유나 협박 등으로 피해자가 처벌을 불원할 경우 범행이 은폐되거나 기조치가 무력화되는 경우가 상당하다. 결국 초기에 사건을 접수했다 하더라도 첫 번째 이유로 악순환을 지속하며 교제 폭력 범죄 사각지대에 놓인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보호 조치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보복 범죄에 노출돼 결국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가해자를 체포해 격리시키는 의무체포제를 두고 있다. 또한 영국은 교제 폭력 전과 조회제도를 갖추고 있고, 신체적 폭력 없는 강요나 통제의 경우에도 교제 폭력으로 보고 최대 5년의 징역을 내리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교제 폭력 범죄를 규율하는 법이 없다. 스토킹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기에 교제 폭력의 스토킹화를 적극 검토해 사각지대를 보완하려는 노력은 하고 있다. 하지만 교제 폭력의 재발 방지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스토킹이나 가정폭력과 같이 '교제폭력처벌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교제 폭력의 정의를 명확히 규정, 스토킹 처벌법의 잠정 조치나 가정폭력범죄처벌특례법의 임시 조치 같은 피해자 보호 절차를 마련하고 연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각종 신체적·정신적 폭력은 책임 가중 사유로 작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현재 교제 폭력 처벌과 피해자 보호를 위한 입법이 활발히 검토, 논의되고 있다. 부디 이른 시일 안에 제정되어 입법 사각지대에 놓인 피해자들에게 환한 빛을 비춰 주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