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걸 칼럼] 전사불망(前事不忘) 후사지사(後事之師)

입력 2024-09-08 13:12:39 수정 2024-09-08 18:28:30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방한으로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12번째라니 두 사람은 가장 짧은 기간 동안 가장 자주 만난 양국 정상이 아닐까 싶다. 두 사람의 브로맨스라기보다는 그만큼 한일 간 협력의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일 관계가 이처럼 가까워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위안부 문제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 등을 이유로 반일을 주장하는 야권과 진보 진영은 한일 간의 밀착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 나선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가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를 비난하면서 "일본에 대한 짝사랑 굴종 외교의 결과는 어땠는가. 정부의 일방적 친일 정책에 힘을 얻은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과 역사 왜곡을 더욱 노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며 "이러다 독도마저 일본에 내주고 자위대가 한반도에 진주하지 않을까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민주당과 진보 진영의 속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사람들의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한일 관계에 관한 의견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독도를 일본에 내주고 한반도에 자위대가 진입하는 것을 허용할 정치 지도자가 있을까. 정치적 견해가 다르더라도 할 말과 못 할 말은 구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 1989년 이후 미국 단일 패권 시대에도 여전히 한반도의 허리를 지나는 휴전선을 경계로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폐쇄 왕조 체제인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 포스트 냉전 시대의 자국 우선주의가 팽배한 가운데도 우리는 미국-일본과 더불어 북한-중국-러시아의 대륙 세력과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다.

북한, 중국, 러시아 모두 핵무기를 보유한 반면, 우린 미국과의 동맹(한미 및 미일)에 의존한 동북아 평화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 간의 갈등은 동북아는 물론 세계 평화와 번영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과 일본은 과거사 문제와 독도 영유권 도발 이슈가 나올 때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 왔다. 많은 일본인은 언제까지 과거사를 이유로 사죄를 반복해야 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 더 많은 한국인은 과거사 부정과 독도 영유권 분쟁을 반복하는 일본에 분노를 주저하지 않는다. 과거사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갈등을 유발하고 두 나라는 물론, 동북아 전체의 미래까지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온 숙명적 이웃이다. 우리에게 임진왜란 7년과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20세기 초반 40년은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치욕의 역사다. 그러나 과거사에 얽매여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한없이 계속할 수는 없다.

박근혜 정부 때 맺었던 위안부 협약을 무효화하고 강제징용에 관한 대법원 판결 이후 한일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고 서로 경제보복을 주고받아 양국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시도 때도 없는 친일파 타령과 죽창가를 부르짖어 반일 감정을 자극한 결과, 누가 무엇을 얻었는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친일파 논쟁을 반복할 수는 없다. 참혹했던 임진왜란은 침략자인 일본의 잔인함만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부패와 무능에 따른 결과였다. 40여 년에 걸친 일제강점기도 조선 후기 이후 실학운동을 비롯한 개혁의 실패와 지배층의 부패와 무능이 누적된 결과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친일 민족 반역자에 대한 분노도 중요하지만 분노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총·균·쇠'로 잘 알려진 미국의 과학자이자 역사지리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한국과 일본에 대해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피를 나누었으면서도 오랜 기간 서로에 대한 적의를 키워 왔다"며, 두 국가의 국민은 수긍하기 어렵겠지만 "그들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고 했다.

역사적으로나 유전학적으로나, 혹은 지정학적으로나, 정치 경제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공동운명체인 두 나라가 서로 적대시하는 것은 두 나라의 미래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사불망(前事不忘) 후사지사(後事之師), 즉 과거의 일을 잊지 말고 미래의 스승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