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큐정전
루쉰 지음 / 마리북스 펴냄
1921년 12월 4일부터 2월 12일까지 베이징 '신보'에 매주 또는 격주로 연재한 루쉰의 '아큐정전'은 아큐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중국인들의 정신승리법에 각성을 촉구하는 소설이다.
아큐는 날품팔이 농민으로 비루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신은 늘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름과 본적은 물론이고 가족도 없고 살아온 내력조차 분명치 않은 남자. 집이 없어 웨이좡 마을의 사당에서 살았고, 일정한 직업도 없어 날품을 팔았으니 "보리를 베라면 보리를 베고, 방아를 찧으라면 방아를 찧고, 배를 저으라면 배를 저었"던 사람. 그가 종종 시비가 붙었을 때 눈을 부릅뜨며 "나도 왕년에는…너보다 훨씬 잘나갔어! 네까짓 게 뭐라고?"라는 말했던 남자는 성안을 기웃거리다가 돈푼깨나 만졌지만 오래가지 못한 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제1장 서에서 제9장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아큐의 행적, 즉 루쉰이 묘사하는 인생은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하는 게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일을 체념하고 마음 고쳐먹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남자의 초라한 삶 그 자체였다.
그는 날마다 모욕당하지만 날마다 승리한다. 건달에게 끌려가 벽에 머리를 찧어도 "내가 자식놈에게 맞은 걸로 치자"고 생각하며 누구에게 돈을 한 푼 빼앗기면 불쌍한 녀석에게 적선을 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흡족해져 의기양양해하며 잠자리에 들곤 했던 인물. 루쉰은 제3장 승리의 기록에서 아큐의 정신승리가 명성을 얻은 사건, 지역 유지인 자오 나리에게 뺨을 맞은 이후로 사람들이 아큐에게 깍듯이 대한 일을 언급하면서 계급사회와 지역민의 노예근성을 힐난한다.
아큐의 정신승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질 것은 없으니 일찌감치 마음을 고쳐먹자는 데서 시작된다. 문제는 이 정신승리가 은폐되고 왜곡된 패배주의라는데 있다. '밤이 선생이다'에서 황현산은 "그는 이 패배주의 속에서 편안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아야 하고,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지녔을 능력과 재능을 깎아내려야 하고, 그래서 결국은 자기 자신을 깎아내려야 한다. 그는 정신적으로 승리하는 순간마다 실제로는 그 자신을 모욕한다."고 적고 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인 '정신승리'는 실제적인 노력을 면제해준다는 점에서 위험천만하다. 때론 나보다 나은 타인에 대한 냉소와 조롱으로, 또 때론 시니컬한 성격으로, 자신을 조작하고 각색하여 정신승리의 화신으로 만들어가는 현대인의 모습은 그래서 위험하고 안타깝다.
전문가의 의견을 무시하고, 오래시간 한 분야에서 입지를 다져온 노력을 가벼이 여기며,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정신승리자들은 거칠게 말해서 낙오자나 다름없다. 대개 정신승리란 나의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닌, 어차피 안 될 거라는 데서 오는 포기와 열패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무시와 굴욕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데 필요한 건 정신승리가 아니라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고 아끼는 자존감이거늘.
이쯤 쓰고 보니 뒷골이 서늘하다. 나는 한화이글스 팬이기 때문이다. 아큐가 21세기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굳이 날품을 팔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한화 응원단장 쯤 따 논 당상이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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