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래의 소야정담(小夜情談)] ‘깡패시인’과 ‘주먹화가’의 낙화유수(落花流水)

입력 2024-08-08 12:55:28 수정 2024-08-08 17:50:38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문맹률이 매우 높았던 해방 전후의 한국 사회에서 이른바 '깡패'의 행세를 한 사람들은 일자무식(一字無識)도 적잖았다. 하물며 대학물을 먹은 당대의 지식인을 깡패와 연계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그것도 일본 유학을 다녀오거나 국내의 일류대학을 졸업한 깡패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낙화유수'(落花流水)라는 '깡패'가 있었다. 1950년대 주먹계를 풍미한 서울 동대문사단의 핵심 멤버였다.

드라마 '야인시대'에도 등장했던 그의 본명은 김태련. 대한민국 '조폭'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서울대 상대 출신이다. '낙화유수'라는 낭만적인 별명도 훤칠한 체구에 수려한 외모를 주목한 여학생들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역시 동대문사단의 '정치깡패'로 명성을 날렸던 유지광도 단국대 정치학과를 다녔던 인물이다. 재학 중 6.25 전쟁 발발로 군에 입대하여 정훈장교로 복무하다가 전역한 엘리트였다.

최고의 학벌을 가졌던 이들이 '깡패'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만한 사연과 혼란했던 시대상황이 작용했을 것이다. 건달 세계에서 '인텔리 주먹'의 상징이었던 '낙화유수'는 '깡패가 아닌 협객'을 자처했다.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의리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겼음'을 웅변하기도 했다. '야인시대'의 주인공이었던 이들 낭만파 협객들도 이제 하나 둘 '떨어지는 꽃'(落花)이 되어 '세월따라 흘러갔다'(流水).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젊은 꿈을 엮은 맹세야, 세월은 흘러가고 청춘도 가고, 한많은 인생살이 꿈같이 갔네'. '낙화유수'라는 대중가요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에 남인수가 불렀으며 아직도 인구에 회자하는 노래이다. 중국 당나라의 시문(詩文)에서 유래하는 '낙화유수'는 무상한 삶을 은유한다. 필자도 '낙화유수'와 관련한 오랜 추억이 있다. 대구 향촌동이 무대였다.

신문사 문화부 재직 시절, 대구문단 일화를 취재하기 위해 당시 원로 문인들과 향촌동 골목을 수없이 서성거렸다. 6.25전쟁 발발과 인민군의 파죽지세에 떠밀려 대구에 온 숱한 피란 문인과 예술인들이 실향과 이산의 아픔을 달랬던 곳, 벼랑 끝에 선 삶의 고뇌와 문화예술에 대한 실낱같던 꿈을 한 잔 술로 나누던 시절, 그 허무의 강을 여울처럼 흐르다 간 사람들의 여정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향촌동 시대'를 신문에 연재하고 '향촌동 소야곡'이란 책으로 출간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셨던 윤장근 작가님. 그와 함께 2년여에 걸친 취재 일정을 마무리하면서 향촌동의 옛 단골집에 앉아서 막걸리를 마시며 불렀던 노래가 '낙화유수'였다. 이제는 '낙화유수'로 흘러가버린 작가에게 들었던 이야기 한 자락이 귓전을 맴돈다. 대구 향촌동에도 '낙화유수' 이상의 협객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름하여 '깡패시인'이자 '주먹화가'인 박용주 선생이다. 대구 반야월에서 태어나 교남학교를 다녔으며 유도를 잘했던 그는 일본 명치대(明治大) 유학시절 최고의 협객이었다. 비호같은 이단 발차기로 왜놈들도 벌벌 떨었으며, 중국 상해 황포강변과 북경행 열차에서 깡패들을 때려눕혔고, 서울 종로의 우미관 앞에서 김두한과 맞붙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런 박용주가 어떻게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되었을까?

구상 시인이 도쿄 유학시절 명성만 들었던 '明大의 龍' 박용주를 처음 만난 것은 해방 후 서울 명동에서였다. 그리고 6.25 전쟁기 부산과 대구에서 허물없는 교유를 가졌다. 서로를 '구상깡패'와 '용주시인'으로 바꿔 불렀다. 구상 시인의 권유로 시작(詩作)을 하고 등단을 했다. 이중섭 화가와도 깊이 사귀며 어깨 너머로 그림을 익혔다. 불의(不義)한 주먹이란 써본 일이 없는 외로운 협객은 그렇게 문학과 예술에 빠져들었다.

'문화깡패'가 되고 싶었던 박용주를 '향촌동 시대'의 '낙화유수'로 부를 수 있는 까닭이다. 늘 스케치북을 끼고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시편을 적던 그는 특히 춘화도(春花圖)를 잘 그렸는데, 말년에 600여점을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남은 작품들을 박용주와 상당한 교류가 있던 누군가가 소장하고 있을 것이라는 풍문만 대구문화예술계의 여운으로 남아있었다. 필자도 들었던 이야기이다.

그런데 50~60년만에 박용주 선생의 화첩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다. 수채화,수묵화 작품을 포함한 춘화도 수십점이 담겨있다고 한다. 유도 9단의 협객이 그린 그림에 호사가들의 이목이 솔깃할 일이다. 격동의 세월을 풍운의 행보로 마감하며 이 강산 낙화유수로 흘러간 '깡패시인' '주먹화가' 박용주. 그 붓질의 농담과 선묘의 리듬에는 어떤 무위자연의 화풍과 촌철살인의 풍자가 스며있을까.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