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며칠 전 경북 영양에서 '고추 산업 대전환을 위한 지역발전 토론회'가 열렸다. 그동안 영양 지역 경제를 뒷받침해 오던 고추 산업이 일손 부족과 생산비 증가로 수익성이 악화되고 중국산 수입 고추의 범람으로 장래가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위기감을 느낀 영양군이 매일신문과 함께 마련한 토론회에 참가하면서 우리나라 고추 산업의 실태를 살펴봤다.
영양은 안동·봉화·의성·청송과 함께 우리나라 5대 건고추 주산지의 하나로 군내 농가의 43%인 1천942호가 고추 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하지만 인구 감소와 고령화, 수입 개방 확대, 이상기후로 인한 병충해 등으로 수급과 가격이 불안정해지면서 우리나라의 고추 산업 위기가 현실화되고 있다.
최근 고추 농가를 대상으로 재배 의사를 문의한 결과 '여건만 되면 그만두겠다'거나 '타 작물 전환' 등 그만두겠다는 농가가 30%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가 경영주의 평균연령이 66.1세인 것을 감안하면 나머지 농가도 얼마 못 가서 고추 농사를 그만두게 될 것이다.
고추 재배 농가 수와 면적은 2000년 90만3천349호, 8만6천787㏊에서 2020년에는 26만1천889호, 3만1천57㏊로 줄어들고 고추의 자급률은 97.4%에서 30.1%로 떨어졌다.
우리나라 고추 재배 농가의 평균 경작면적은 360평, 10a당 노동 투입 145시간에 단수는 232㎏에 불과하다.
반면 중국은 30, 40대 젊은 경영주가 규모화된 경작지에서 기계로 심고 초밀식 재배와 점적관수, 일시 수확 등 신기술을 적용해 노동 투입은 43~48시간, 단수는 무려 660㎏까지 생산된다고 한다.(한국국제농업개발학회지, 2019)
오랫동안 농가의 주요한 소득원이자 일자리 역할을 해온 고추 농사가 무너지고 고추를 기반으로 한 식문화, 특히 국산 고추를 원료로 한 고추장과 김치조차 먹을 수 없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이르게 됐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고추 재배에 뜻을 가진 젊은 농업인을 확보하고, 스마트팜 등 신기술 도입으로 생산 효율을 높이고, 홍보·판촉을 강화하는 이른바 고추 산업의 생산과 유통구조를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날 밤, 행사 참석자 중 한 분이 영양의 고추 산업을 살리려면 500~1천 평 규모의 비가림 시설이 필요한데 개별 농가가 설치하려면 부담이 큰 만큼 정부가 일정 부분 지원해 주면 좋겠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렇다. 수백억원의 예산을 들인 첨단시설을 설치해 몇몇 사람에게 혜택을 주기보다 지역의 농민들이 고추의 육묘에서 이식·방제·수확·건조·판매에 이르기까지 작업 과정에서 겪는 애로를 해소하는 보급형 스마트팜 모델을 개발, 일정 부분 자기 부담을 하더라도 많은 농가가 혜택을 보게 할 수는 없겠는가?
젊은 후계농이 중심이 돼 마을이나 들녘 단위로 경영체를 구성해 지역의 농지나 시설은 물론 농기계와 노동력 등 자원을 공동으로 이용하면 규모화로 인한 생산비 절감은 물론 다양한 2·3차 산업 참여로 경영의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
위기의 고추 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생산에서 판매까지 작업 과정별로 새로운 시설이나 기술 접목으로 인한 노동 투입과 효율성에 대한 연구개발이나 국내외 고추 산업 관련 정보 공유, 그리고 기초 통계 정비 등 작지만 꼭 필요한 일에서부터 답을 찾아야 한다.
사람들이 '변해야 산다'고 하지만 정작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바꿀 것이냐'에 대한 문제의식과 구체적인 목표가 없으면 결국 '하기 좋은 말, 듣기 좋은 구호'에 그치고 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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