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장 에슈노즈 지음 / 열린책들 펴냄
열일곱 살 공장견습공에서 화학연구소를 거쳐 허드렛일에 종사하던 남자는 억지로 참가한 9킬로 크로스컨트리 경주에서 2등으로 들어온다. 성실한 성품 덕에 하면 전심전력을 다하게 되었고 "정말 아주 이상하게 잘 뛴다."(15쪽)는 주위의 평가를 받으면서 운동이 좋아지기 시작한 독특한 케이스였다. 게다가 자신에게 경쟁하기 좋아하는 성품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중장거리에서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운 그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음에도 다른 그 누구와도 전혀 털끝만치도 닮지 않은 사람"(53쪽)이었다. 두 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와 은메달 1개를 딴 체코슬로바키아의 육상영웅. 바로!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페크이다.
장 에슈노즈의 소설 '달리기'는 과연 달리는 이야기다. 오직 달리는 사람의 이야기고 한 시절에 대한 우울한 삽화인 동시에 모든 것을 지배한 이념에 관한 느슨한 블랙코미디이다. 소설은 1장 "독일인들이 모라비아에 들어왔다."로 시작해 20장 "소련인이 체코슬로바키아에 들어왔다."로 끝나는 완벽한 수미상관 구조를 취한다. 시작과 끝이 같은 원형의 호응인 까닭. 소비에트 연방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삶만 허락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성취는 사라지고 체제의 성패만 남는 부조리가 잔존했기 때문이다. 에밀이 아무리 많은 메달을 따고 기록을 갈아치워도 그것은 개인의 영광이 아니었다. 성적보다 성실함과 충성심을 요구하는 국가이데올로기는 세계 스포츠사의 영웅을 한낱 체제 선전도구로 사용했을 따름이었다.
작가는 사회주의 육상영웅의 탄생과 몰락을 그린 소설을 통해 공산주의는 한 사람의 삶에 어떤 식으로 개입하고 어떻게 일상을 직조하여 인생을 통째로 디자인하는지. 혹은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용 스포츠가 재능 있는 개인을 발굴 육성하고 영웅으로 세운 다음 나락으로 보내는 과정에 관하여 기록한다. 자유로운 개인을 억압하는 국가 권력의 작동방식 이를테면 법 밖에서 예외가 된 권력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소설이 또 있을까 싶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중반까지도 완전한 허구라고 여기기 십상일 터. 작가는 실존 인물의 실제 업적을 당대 역사와 버무리면서도 2/3 지점에서야 자토페크 라는 이름을 드러내는 영리함을 보인다. 허구가 실재로 변하는 극적인 순간이고, 공산주의가 자신이 길러낸 육상영웅과 함께 침몰하는 시간이다.
보기에 멋있진 않아도 뛰기에 가장 적합하고 가장 덜 피곤한 방식으로 자기 명성을 쌓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는 끊임없는 성능을 개선하며 좋은 결과를 끌어내는 공산주의의 부속으로 전락한다. 68년 바르샤바 조약 군대가 프라하를 침공했을 때, 마흔여섯 살의 에밀이 시위대에 합류하여 침략을 고발하며 저항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 결과는 거리의 청소부였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사상비판을 거부하며 유리창 청소부가 되는 토마시의 행보가 오버랩 된다.).
에밀의 선택이 어느 쪽이든 그의 마지막이 스포츠 정보센터의 지하실 자료 정리담당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인즉.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얼음장 같은 바람이 부나 수많은 사람을 제치고 거의 항상 줄기차게 승리를 거뒀"(74쪽)던 한 남자의 파국,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착한 에밀이 말했다. 좋아요, 자료 정리관이 제게는 과분한 일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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