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아버지의 빈자리, 그리움의 시간들입니다

입력 2024-07-03 16:50:49

영화평론가 서성희 씨의 아버지 고(故) 서태종 씨

1973년 동촌유원지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뒷쪽 아버지와 어머니, 앞쪽 작은 언니와 나. 서성희 씨 제공
1973년 동촌유원지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뒷쪽 아버지와 어머니, 앞쪽 작은 언니와 나. 서성희 씨 제공

아버지가 떠나신 지 벌써 1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버지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때로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너무 선명해서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리움이 가슴 한켠을 채운다.

어린 시절 내 기억 속 아버지는 무서운 분이었다. 아버지는 키가 크고, 고철상을 운영하며 늘 거친 모습이었다. 국민학교 때 우연히 저 멀리서 걸어오는 아버지를 보고 전봇대 뒤에 숨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당시 아버지는 그만큼 나에게 무섭고 어려운 분이었다. 그랬던 아버지가 세상에 뿌리박지 못하고 흔들리던 나의 20대 즈음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연극반의 주연배우이자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연극영화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에는 영화사에 취직했지만,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과 실망이 있었다. 그것이 반복될 때마다 처음에 타올랐던 영화에 대한 열정도 꺾이곤 했다. 20대 내 모든 열정을 바쳤던 영화에서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시련의 순간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건 아버지였다.

마치 무서운 호랑이 이미지에서 민화 속 호랑이처럼 친근하게 변해가는 아버지는 나이가 들수록 바깥일보다는 집안일을 챙기셨고, 특히 6남매 중 유일하게 결혼하지 않고 있던 나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20대 후반 진로 고민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내게 다시 학교로 돌아가 박사과정을 밟도록 적극 지지한 사람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단순히 내가 인생의 승자가 아니라 생애 처음 가졌던 열정을 잊지 않고 사는 삶을 선물해주신 분이다. 아버지의 믿음과 사랑 덕분에 나는 포기하지 않고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또 내게 삶의 태도에 대해서도 몸소 가르쳐주셨다. 이타심과 책임감,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진솔한 태도. 아버지는 늘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일찍이 시골에서 도시로 나온 7남매 맏이로서의 책임감과 가까운 친척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몸소 실천하셨다. 내 어린 시절 기억 속 우리 집은 시골에서 올라온 친척들의 사랑방이자 임시로 머무는 숙소 같은 곳으로 늘 북적였다. 아버지의 이타적인 삶의 태도는 나에게 큰 자부심이자 이후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선택해야 하는 매 순간 내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나침반이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영화 관련 일을 지속해 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마음이 들어 머뭇거리고 있을 때도 희망이 삭제된 삶의 고통 속에서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깊은 연민과 무한한 지지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 덕분일 것이다. 내 비록 성공하지도, 그렇다고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영화에 대한 남루한 글쓰기와 말하기를 지치지 않고 수행하고 있는 뿌리 깊은 근원에는 아버지의 지지가 자리하고 있다.

아버지가 그립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이 다시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가 내게 보여주신 사랑과 지지는 내 삶에 큰 위로가 되었고, 앞으로도 살아가는 데 뿌리 깊은 자양분이 될 것이다. 살아생전에는 쑥스러워 말하지 못했던 "아버지, 사랑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아버지께 편지를 보낸다.

"아버지, 당신이 너무 그립습니다.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미소, 당신의 모든 것이. 하지만 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당신이 자랑스러워할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아버지, 바위보다 무겁고 태산처럼 큰 짐들일랑 모두 내려놓으시고 편히 잠드소서. 언젠가 다시 만날 그날까지, 아버지가 제게 보내주신 무한한 지지와 연민의 시선을 잊지 않고 잘 살아가겠습니다. 아버지, 정말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