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7월 13일 갤러리CNK
각박하고 혼란한 현실을 사는 누구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롯이 편안함을 느끼는 자신만의 은신처가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음악이고, 누군가는 책이며, 누군가는 음식일 것이다.
전재은 작가에게는 그것이 항상 장소였다. 어릴 적 장롱에 숨어있거나 동화책을 높게 쌓아 만든 집 속에 있는 것을 좋아했고, 성인이 돼서도 바다나 강, 눈이 쌓인 고요한 숲 등 현실과 유리된 공간을 찾았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장소가 인간에게 주는 의미, 또는 삶의 연속성을 느끼고 위안과 평정을 주는 장소의 특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충족되지 않는 현실 너머 미지에 대한 열망이 더해져, 캔버스 위에 층층이 쌓였다.
그래서 작품 제목들은 모두 어떤 장소에 대한 얘기, 혹은 그 장소에 대한 기억과 사유가 주를 이룬다. 목련나무가 있는 밤의 마당이나 눈 숲, 동백이 피었던 장소, 바다의 겹 등 과거의 시각적 경험을 통한 장소의 기억뿐만 아니라 먼 곳, 기억의 서랍, 서랍 속의 편지처럼 문학 속 장면을 통해 환기되는 기억들도 작품에 등장한다.
무엇보다 독특한 것은 그 기억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작가는 화면 위에 밀도 높은 물감을 겹겹이 쌓고, 그 위에 바느질한 오브제들을 실과 천으로 단단하게 엮어 물감 위에 얹는다. 때로는 눈물처럼 실을 늘어뜨리기도 하고, 때로는 쉽게 알아챌 수 없는 텍스트나 형태를 수놓기도 한다. 거친 물감의 층위와 전혀 이질감 없이 어우러지는 실과 천은 감각적인 조화를 이룬다.
"예전 기억과 최근의 기억, 실제 경험한 것의 기억과 문학을 통해 상상한 것의 기억 등이 머릿속에 뒤엉켜 기억의 지층을 이룬다고 생각해요. 작업에서 여러 층의 매체와 물감의 층위를 반복해서 올리고 천에 바느질하는 행위는 경험과 기억의 다층성과 복합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죠."
그의 작품은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 그렸던 그림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말처럼 어린 시절의 표상과도 같은 기호나 상징의 형태들이 낙서나 흔적처럼 드러나는데, 장소에 관한 기억의 지층을 얘기하는 작가만의 언어인 셈이다.
작가는 "전시 제목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읽어 온 언어'는 존 버거의 책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내가 지금 캔버스 위에 펼쳐내는 것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몸이 감각해온 언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며 "그 중에서도 나는 촉각적인 언어, 즉 질감이 잘 드러나는 천과 같은 것에 강렬하게 반응해왔기에 그러한 물성을 극대화시키는 작품을 구현해내려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선보이는 첫 전시에서 그는 여러 층위의 질감으로 기억 속 사물을 병렬해나가며 새로운 시각언어를 보여주는 작품 20여 점을 선보인다. 전시는 갤러리CNK(대구 중구 이천로 206)에서 7월 13일까지 이어진다.
갤러리CNK 관계자는 "시간이 차곡차곡 중첩된 작가의 작품은 관람객들이 각자의 과거로 빠져들어, 장소나 시간 속에서 빛났던 기억의 순간들과 마주하게 만든다"며 "전시를 통해 기억 속 쌓아뒀던 아련한 감정들과 마주하는 사유의 시간을 경험하길 기대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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