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전 폭우 수색 도중 참변…머리 큰 흉터에도 공수부대行
“가지 말라고 할걸”…아들 마지막 출근길, 26년 지나도 후회
70년 사과 농사지어 번 돈…소방영웅 장학기금 기탁 "속 시원해"
기록적 폭우였다. 장대비가 쏟아졌던 1998년 10월 1일. 38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태풍 '예니'가 대구경북에 불어 닥쳤다. 범어천이 불어 넘쳐 신천시장이 물에 잠겼다. 곳곳이 물바다로 변했다. 사상자만 380명에 달했다. 당시 26세였던 2년차 소방관 '고 김기범 소방교'는 이날 금호강에서 실종자 수색을 하다 급류에 휩쓸려 그만 세상을 떠났다.
◆"가지말라고 할 걸"
김 소방교의 아버지 김경수(83) 씨는 지난 12일 순직한 소방관 아들의 이름을 따 평생 모은 전재산 5억원을 대구소방안전본부에 기탁했다. '소방영웅 김기범 장학기금'은 김 소방교의 생일인 2월 20일 순직소방공무원 자녀 및 군위군 전몰군경 자녀들에게 매년 수여될 예정이다.
거액의 장학기금은 20여년이 지나도 여전한 외아들에 대한 애끓는 부정(父情)에서 비롯됐다. 김 소방교의 아버지 김씨는 한평생 각별한 사랑으로 아들을 키워냈다.
김경수 씨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태어난 지 두 달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국민학교도 겨우 마쳤다. 어린 중학생 나이에 과수원 소작농으로 들어가 생업을 시작했다. 한평생 고단한 삶을 살아왔지만, 장성한 아들을 보면 그간의 고된 기억도 싹 씻겨 내려가는 듯 했다.
김 씨는 "비록 학교도 겨우 마쳤지만, 잘 자란 아들 있는데 뭐가 대수냐. 내 인생 가장 큰 자랑이었다"고 했다.
"아빠. 오늘 비가 너무 많이 온다. 가도 괜찮겠지?" 순직 전날, 김 소방교는 군위 본가에 있었다. 다음날 근무를 위해 현관을 나서던 아들은 쏟아지는 장대비를 보고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들과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던 김씨는 말을 잠시 이어가지 못했다.
김씨는 "그때 아들에게 얼른 가라고 했다. 가지 말라고 할 걸 참 후회스럽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용돈 다시 돌려주던 효자, 애국심도 남달라
아들은 보기 드문 효자였다. 학창시절 용돈을 쥐어주면 한 푼도 쓰지 않고 책갈피처럼 끼어놨다가 "어머니 차비로 쓰시라"며 고스란히 되돌려주곤 했다. 소방관이 돼서도 그랬다. 월급을 받으면 아껴 쓰며 저축했다가 1년치를 모아 부모님께 그대로 돌려줬다.
애국심과 근성도 남달랐다. 김 소방교는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특수부대인 공수부대를 지원했다. 부모가 군 생활이 힘들다고 한사코 말려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김 씨는 아들이 신체검사에서 떨어지겠거니 했다. 아들의 머리에 큰 흉터가 있고 바늘로 꿰멘 자국이 있어 필히 문제가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들의 뜻을 막을 순 없었다. 김 소방교가 친구들을 불러 흉터 자국을 검게 칠해 가리면서까지 입대에 굳은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70년 사과 농사지어 번 돈…기탁금으로 써서 속시원해"
이렇듯 누구보다 자랑스런 아들을 기리는 기금을 만드는 건 아버지 필생의 사업이었다.
기탁금 5억원은 김 씨가 70년간 과수원 사과 농사를 지으며 차곡차곡 모은 돈이다. 김씨는 3일에 한 번 담배 한 갑을 사는 것 말곤 돈을 거의 쓰지 않는다. 옷도 늘 단벌이다.
피땀 흘려 모은 돈이지만 속이 후련할 뿐이란다. 아들이 순직하고 나서 꼭 한번은 보람된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아들 사진을 보면 힘이 들어서 대부분의 사진을 불태웠다. 아들의 초등학교 입학식, 군생활 사진, 소방관이 되고 나서 처음 찍은 사진 정도만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랑스런 '소방영웅 김기범'을 기억해주길 바랬다.
아들 사진을 애틋한 눈길과 손으로 어루어만지던 김씨는 "내 이야기보다 아들의 이름이 오래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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