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반가운 사람이 찾아왔다. 오래전에 치료했던 중학생이 어엿한 변호사가 되어 로펌에 취직했다고 인사하러 온 게 아닌가. 자퇴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아이돌 콘서트만 찾아다니고 부모님 몰래 오토바이를 타다가 경찰에 잡혀간 적도 있었다. 어머니 말에는 무조건 짜증내고, 말리는 아버지와 몸싸움까지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아들이 밀어붙였던 사춘기의 폭주 앞에 어머니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이런 반전의 순간에 정신과 의사는 큰 보람을 느낀다. 자녀가 더 큰 성장을 위해서는 부모 틀 안에 있을 때, 미리 약간 좌절이나 어려움을 경험하는 게, 세상에 나가서 살아가는데 예방주사가 될 수 있다.
신학기가 되면 선생님들은 남겨진 일들, 인계받아야 할 과제로 신경전이 심해지고 부모님도 자녀의 신학기에 긴장이 된다. 근데 막상 당사자인 학생들은 다른 풍경이다. 어느 중학생에게 개학이 언제니? 물으니 '모르는데요. 3월 며칠일걸요.' 라고 대답한다. 엄마가 볼 때는 시간이 많지가 않고, 할 게 너무 많은데, 늦잠 자고 핸드폰만 잡고 있는 자녀가 걱정만 될 뿐이다.
엄마의 초중고 시절은 쏜살같이 지나갔던 것 같고, 최선을 다 하지 않은 후회감,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온갖 고난의 복병들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나의 자녀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 세상의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자녀는 오늘 뭐하고 놀지? 벌써 시험 준비해요? 그럼 언제할거야? 몰라요. 알아서 할테니 가만히 놔두라고.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시험 기간이 다가온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고 백년 후에나 닥칠 것처럼 행동한다. 여기서 부모와 자녀의 큰 충돌이 생긴다.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짜증나' 이다. 두 번째는 내가 알아서 한다, 가만히 좀 둬요. 라는 말이다. 중학생과 상담하면서, 넌 엄마에게 뭐가 그렇게 짜증나니? 라고 물으면 그냥 모르겠다고 답한다. 밥 먹어라고 해도 짜증나고, 일어나서 학교 가라고 한다고 짜증나. 라고 하니 도대체 대화가 되지 않는다.
이처럼 감정 분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청소년기의 큰 특징이다. 그냥 빨강색 까만색 이렇게 대답하는 것과 같다. 10가지 색의 크레파스보다 32색으로 그리면 더 세밀하고 표현하기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청소년기는 아직 단순한 크레파스를 가지고 있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많은 부모님들은 자녀의 진로를 정할 때 가장 답답해하는 것이 우리 애는 뛰어난 재능도 없고 예체능으로 하기에는 특별나지는 않고, 머리는 좋은 거 같은데 노력을 안하니 막막하다고 한다. 자녀를 이해할 때 메타인지능력이라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능력이 얼마 만큼인지 스스로 아는 것을 말한다.
메타인지에 대한 실험이 있다. 성인에게 20개의 영어 단어를 주고 5분 안에 몇 개를 외울 수 있냐고 물었더니, 56% 이상이 자신이 할 수 있겠다고 예측한 갯수의 1~2개 차이로 맞췄다. 예를 들면 15개는 외울 수 있겠다고 대답한 사람은 14개나 16개의 단어를 외웠다는 거다.
청소년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보였다. 20 % 정도만 가능 했고, 나머지 '다 맞출 수 있어요, 한개도 못하겠어요.' 둘 중 하나의 대답을 했다. 메타인지가 안되니까 자기가 뭘 준비할지도 모르고, 근거 없는 자신감만 보이거나, 반대로 열심히 잘 하면서도 겁먹고 자신감 없어하는 애들도 있다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이 한 사람의 어른 역할을 하게 되는 시기가 점점 늦어지고 있다. 이전에는 청소년기가 1318 이었다면, 지금은 1030이다. 빨리 시작되고 늦게 끝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고, 우리 애는 상처받으면 안 되고 다치면 안 되고 좌절하면 안 된다고 하는 부모도 있다. 결국 좌절 경험이 없으면 더 큰 적응 문제에 봉착하고 힘든 일만 생기면 부모만 쳐다보는 어른 아이에 머물 위험성이 있다. 오늘도 짜증내는 아들이 있다면 사춘기 여정을 잘 건너가고 있다는 거니 안심하시면 될 거 같다.
김성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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