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일기쓰기를 통해 자신을 회복하는 여정…'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입력 2023-11-16 13:36:57 수정 2023-11-18 07:06:59

이주혜가 풀어놓는 회복의 서사

출처-클립아트코리아

'당신의 삶을 써보세요. 쓰면 만나고, 만나면 비로소 헤어질 수 있습니다.'

별 기대 없이 집어 든 소설책이었지만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 맞닥뜨린 이 문장 하나에 매료돼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비슷한 경험을 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포기하고 싶을 것만 같던 어느 날, 십수 년 만에 처음으로 일기장을 장만했다. 사소한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들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그날 썼던 첫 문장이 "내가 날 포기하면 세상도 날 포기한다"였다.

이후 그 일기장에는 어떤 날은 답답한 속내를 쏟아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날이 정말 사소한 하나까지 그날 경험한 감사한 일들을 문장으로 써 내려갔다. 따뜻한 햇살 한 줌에도 미소 짓고, 여전히 해맑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10년 만에 만난 친구의 모습에도, 가끔 혼자 미소를 짓게 만들어 주는 조카의 말에도 감사하다는 말을 손으로 한 줄 한 줄 적으며 '내가 그렇게 바닥은 아니구나' 내면의 에너지를 서서히 채워갔다. 그렇게 나을 짓누르던 통증과 우울의 무게에서 조금씩 벗어다 다시 물 위로 떠 오를 수 있었다.

이 책의 사연도 비슷하다. 오십 대에 접어든 주인공은 어느 날 남편 석구가 정당 활동을 함께 하던 여자 동료를 스토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여기에 더해 남편은 '자신의 행동이 진심이었기에 부끄럽지 않다'라고 말해 주인공을 더욱 상처받게 한다.

이후 별거를 위해 살림을 정리하고, 유독 남편과 각별했던 딸 해준 과의 거리도 멀어지면서 주인공은 공황장애에 시달리게 된다. 숨이 안 쉬어지고 땅이 꺼질 것 같은 공포감이 수시로 밀려오며 병원을 찾게 된 주인공은 정신과 의사로부터 약물치료와 함께 일기 쓰기를 권유받게 된다. 자신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행위가 바로 일기 쓰기라는 것이 정신과 의사의 말이었다.

그런 그의 일기는 '나'가 아닌 '시옷'이라는 별명으로 진행된다. '나는'이라고 시작하면 도저히 한 줄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서로 기대에 그저 꼿꼿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좋은 '시옷'을 골랐다는 게 주인공의 설명이다.

출처-클립아트코리아

시옷은 아주 어릴 적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부터 시작해 집안의 부도로 인해 가난하고 퍽퍽했던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80년대, 여성성을 존중받지 못한 채 남자아이로 비밀을 감춘 채 살아야 했던 주체성의 혼란, 그 속에서도 따뜻한 위로가 됐던 친구 윤수와 활짝 웃어주던 윤심 언니의 사연 등 사십 년이 넘게 지나도 옅어지지 않는 기억을 세밀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이런 행위들이 굳이 과거의 아픔을 들춰내는 행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난한 쓰기의 과정을 통해 시옷은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통해 지금 발 딛고 선 자리에서 어느 쪽으로 걸음을 올려야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지금 내면의 흔들림을 겪고 있다면 글쓰기를 통해 자기 내면을 직면함으로써 다음으로 나갈 수 있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짙은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