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과 전망] 영남 공론 주도했던 호계서원

입력 2023-11-21 15:06:58 수정 2023-11-21 18:38:09

엄재진 북부지역 부국장

엄재진 북부지역 부국장
엄재진 북부지역 부국장

꼭 3년 전이었던 2020년 11월 20일. 영남 유림 사회의 '향전'(鄕戰), 병호시비가 시작된 지 400년 되던 해의 하루였다. 이날 향전의 한복판에 서 있던 유가의 후손과 영남 유림 후학들은 마침내 400년 갈등의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 현장에 함께했다.

향전의 장소였던 호계서원이 '복원'됐다. 시비를 낳았던 '위차'(位次·위패의 서열) 문제가 합의되면서 위패 '복설'도 순조롭게 이뤄졌다. 400년 병호시비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이날 행사에는 관찰사(경상북도지사)와 고을 부사(안동시장)를 비롯해 지역 유림 어르신, 퇴계·서애·학봉·대산의 후손들이 참여해 서로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병호시비'라 일컬어진 오명이 깨끗이 씻겨져 내려갔다. 오랜 영남 유림의 갈등도 일소됐다. 호계서원이 유림 화합의 상징이 되고 만세 후인들에게 귀감이 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호계서원은 또 다른 시비에 휘말려 빛바랜 채 덩그러니 남아 있다. 영남의 유림 사회가 400년 시비에 마침표를 찍었지만, 안동 유림들이 다시 갈라치기를 하고 있다.

이번에는 옛 예안현 유림들이 호계서원 장소를 문제 삼았다. 덩달아 퇴계 선생의 위패를 도산서원과 호계서원에 중복해 모시는 것도 문제 삼았다. 급기야 퇴계 선생의 후손들이 퇴계 위패를 밖으로 빼내 가기에 이르렀다.

"조선 500년 역사에 왕명에 의하지 않고 주벽(主壁)의 위패를 퇴위한 경우는 없다. 경북 유림들의 공의에 의해 복설됐다. 석연찮은 논리에 의해 수많은 공론과 대의가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했던 유림 사회의 걱정이 새삼 떠오른다.

도산서원 재유사 출신 모임인 '도산 보인회'도 입장문을 발표했다. "호계서원 복설에 따른 갈등과 혼란이 지속되고 대중들에게 전달된다면 유림 사회는 국민의 지탄 대상이 되고 말 것"이라고 강조했다.

영남 유림 사회는 걱정이 태산이지만, 정작 복원·복설에 직간접으로 역할을 했던 인사들이 '유림 사회의 몫'이라며 외면한 채 뒷짐 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6일 안동시청 대동관에서는 의미 있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한국서원학회가 조선 후기 시대별로 호계서원과 영남 유림들이 어떤 공론 형성과 역할을 했는지 살펴본 귀중한 자리였다.

1620년 호계서원(옛 여강서원)이 건립된 이후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영남 유림 사회 공론 형성과 서원의 주도적 역할을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기회였다. '호계강회'는 풍속이 무너짐이 극에 달해 오륜(五倫)이 사라질 위기에서도 영남만이 의관의 예를 홀로 지키는 사풍 진작의 근원이 됐다. 이러한 사풍은 의병 운동으로 이어졌다.

19세기 후반 혼란했던 시기, 호계서원의 유림들은 대원군의 열한 차례 훼철 공문에도 서원 훼철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전국 대부분의 서원들이 선현 향사 기구로 전락할 때도 교육의 전통을 발전시키고 명맥을 지키도록 했다.

이후 호계서원을 중심으로 한 퇴계 학풍은 의병 호계통문,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한 나라의 철학과 정체성을 지탱해 왔다. 그야말로 호계서원은 영남 유림의 학맥과 결속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이렇듯 공론을 형성해 온 호계서원의 위상을 지금의 사람들이 퇴색시키고 있다. 경북도와 안동시, 한국국학진흥원은 호계서원의 강학 기능을 살릴 묘안을 짜내야 한다. 유림 사회도 진정 호계서원이 다시 공론의 장으로 거듭나도록 나서야 한다. 선비는 대의를 위해 나섬에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는 선현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보여 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