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노경석] 무형의 달러 제국과 한국의 선택

입력 2025-06-25 18:02:39 수정 2025-06-25 18:05:17

노경석 경제부장
노경석 경제부장

가상화폐 시장의 무게 중심이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 광풍처럼 몰아치던 비트코인의 투기성은 서서히 퇴조하고, 이제는 실물 화폐에 가치를 고정한 '스테이블코인'이 새로운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전 세계 디지털 금융 질서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은 이 새로운 화폐는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화폐 주권'의 영역을 두고 벌어지는 조용한 패권 전쟁의 선봉에 있다.

특히 미국 달러에 가치를 연동한 테더(USDT)와 USD코인(USDC)은 이미 글로벌 결제와 송금, 탈중앙화금융(DeFi)의 표준으로 기능하고 있다. 도이체방크의 조사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 거래 규모는 지난해 28조달러(약 3경8천676조원)에 달했다. 스테이블코인의 사용처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조건, 담보 기준, 감독 체계를 담은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달러를 앞장세운 금융 헤게모니가 이제 블록체인 위에서 재구성되고 있다. 눈에 띄지 않지만 강력한 움직임이다. 이른바 '무형(無形)의 달러 제국'이다.

중국은 이미 디지털 위안화 발행에 돌입했고, 일본과 유럽연합도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실험을 본격화하고 있다. 민간 주도의 스테이블코인과 공공 주도의 CBDC가 동시에 확산되는 이 흐름은 단순한 통화 시스템 개편을 넘어, 세계 경제 질서 자체를 뒤흔드는 조용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무혈(無血)의 패권 전쟁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출발선에서 망설이고 있다. 지난 10일 '디지털자산기본법안'이 발의됐지만 한국은행과 금융당국은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금융안정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를 앞세우며 신중론을 고수하고 있다. 물론 자산 담보의 투명성, 발행 주체의 책임성 등 제도적 허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보천리(牛步千里)라는 말은 위기의 시대에 통하지 않는다.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실시간 거래 수단이자, 탈중앙화를 전제로 한 금융 네트워크이며, 동시에 국가 경제 질서와 통화 정책을 위협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의 신화폐'다. 지금 우리가 선택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선택조차 할 수 없는 구조로 고착될지도 모른다.

한국은 기술력이나 제도적 역량에서 결코 뒤처진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 최고 수준의 블록체인 개발 인프라, 핀테크 스타트업 생태계, 디지털 금융 수용도가 존재하는 나라다. 이런 조건을 바탕으로 '한국형 스테이블코인 모델'을 구상해야 한다. 민간의 창의성과 정부의 감독력이 조화를 이루는 공사혼합(公私混合)의 구조, 국채나 외환보유액과 같은 고신뢰 담보자산을 기반으로 한 안정성 중심 설계, 그리고 글로벌 이용자 신뢰를 확보하기 위한 투명한 정보 공시 체계가 기본이 돼야 한다.

결국 '왜 해야 하느냐'는 질문보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집중해야 할 시점이다. 전 세계가 디지털 금융 질서 재편의 파고를 넘는 동안, 한국이 과거의 규제 틀에만 갇힌다면 우리는 또 한 번 '기회를 놓친 나라'로 기억될 것이다.

디지털 화폐,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새로운 질서에서 우리는 능동적으로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남이 짜놓은 질서에 종속될 것인가. 지금 필요한 건, 선제적 결단과 실행이다. 화폐의 미래를 결정짓는 무대에 우리는 아직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주저(躊躇)는 퇴보요, 준비된 도전만이 생존을 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