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용된 권리, 악성민원] 전화 제때 안 받는다고 폭언·폭행…골병드는 구청 공무원들

입력 2023-10-22 16:20:58 수정 2023-10-22 20:54:49

대구시·8개 구군 위법 민원, 북구청이 가장 많아…남구·대구시 순
폭언·폭설이 74.8%, 신분 위협·협박이 15.1%
민원처리법 개정에도…불면증·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일선 공무원, "보호 제도 유명무실"

대구시청 종합민원실에서 특이민원인 발생을 가정한 대응 훈련 하는 모습. 매일신문 DB
대구시청 종합민원실에서 특이민원인 발생을 가정한 대응 훈련 하는 모습. 매일신문 DB

"너희 왜 내 전화 안 받아."

지난 7월 대구의 한 행정복지센터에 근무하던 이모 씨의 귀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수급자인 40대 A씨였다. A씨는 평소 술을 마시고는 하루에도 10번 넘게 매일 같이 전화해 행정복지센터 직원들 사이에서는 유명했다. 통화 내용은 "먹을 것이 없으니 라면을 보내달라" 등 후원 요구가 대부분이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동 행사가 있어 민원 응대를 할 수 있는 직원이 부족했다.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자 화가 난 A씨는 직접 행정복지센터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폭언과 욕설, 협박을 30분 이상 쏟아내던 A씨는 급기야 "따라 나오라"며 직원들에게 위협을 가했다.

이 씨는 "최근에도 먹을 것을 달라며 여러차례 전화 왔다"며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응할 수밖에 없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민원인 위법 행위 대구 북구청이 가장 많아

대구시에 따르면 지난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동안 대구시와 8개 구·군에서 벌어진 폭언, 폭행 등 민원인의 위법행위는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만 모두 6천848건이다.

구·군별로는 북구청이 1천302건으로 가장 많았고 각각 1천274건, 1천133건을 기록한 남구청과 대구시가 2위와 3위를 기록했다. 이어 동구 1천19건, 달성군 574건, 서구 559건, 수성구 456건, 중구 372건, 달서구 159건 순이었다.

유형별로는 폭언 및 폭설이 5천125건으로 74.8%를 차지했고 신분 위협 및 협박이 1천64건으로 15.5%를 기록했다. 이 외에도 성희롱 112건(1.6%), 기물파손 35건(0.5%), 폭행 및 폭력 32건(0.4%), 기타(위험물 소지, 주취 소란, 업무방해) 480건(7%) 등이었다.

취재진과 만난 민원 담당 공무원들 사람을 기계처럼 대하는 악성 민원인에 몸서리쳤다. 한 구청 과장 전모 씨는 "최근 5년 사이 악성 민원인이 더 늘어난 기분"이라며 "공무원들은 복지 매뉴얼 대로 안내하는데 유튜브나 SNS 등을 통해 잘못된 정보를 접하곤 공무원이 거짓말을 한다고 따지는 분들이 부쩍 늘었다"고 증언했다.

특히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 등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는 부서는 기피 부서로 꼽힌 지 오래다. 20년 가까이 구청 민원 관련 부서에서 근무한 김모(40대) 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민원인의 욕설과 짜증, 협박에 시달리는데 그런 날들이 매일 반복된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유명무실 민원처리법

국회와 정부는 지난해 민원인으로부터 공무원을 보호하기 위해 '민원처리법'과 '민원처리 시행령'을 개정해 민원 공무원 보호 조항을 법률로 격상하고, 민원실 안전요원 배치 등 구체적인 보호조치를 시행령에 담았다.

문제는 정작 공무원들은 민원처리법을 통해 실질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보복과 후환이 두려운 일선 공무원들은 악성 민원이 생겨도 참고 받아줄 수밖에 없다. 대구 한 구청 관계자는 "업무방해로 고발해도 현실적으로 처벌이 미약해 적극적인 대처가 어렵다"고 밝혔다.

악성 민원인과 마찰을 빚은 직원을 죄인 취급하는 조직 분위기도 문제로 꼽힌다. 민원인이 앙심을 품고 구청 감사실이나 국민신문고 등에 고발하는 경우 직원은 사유서를 작성해야 한다. 잘못한 것이 없더라도 '공무원이 응대를 소홀히 한다'는 민원이 제기되면 무조건 사유서를 작성해야 하는 것이다.

구청 직원 김모 씨는 "사유서를 쓰는 과정이 또 다른 스트레스로 다가오니 민원인의 갑질을 받아주는 편이 차라리 나은 것"이라고 답답해했다.

민원인의 폭언, 협박에 불면증이나 우울증 등 정신적 트라우마를 얻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구청 직원은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공무원들을 보호하거나 지원해 주는 현실적인 제도도 없다"고 아쉬워했다.

전문가들은 악성 민원에 의한 피해가 계속되는 배경으로 문화지체 현상을 꼽았다. 선진적 제도에 비해 일각에서 드러나는 시민의식 수준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진단이다.

이승협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는 "민원인은 정보공개청구부터 국민신문고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민원을 넣을 수 있는 반면 공무원 개인은 그렇지 못하다. 이 같은 불균형이 민원 갑질로 이어지는 것이다. 일선 공무원을 보호할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