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이해가지 않는 책을 다룰 때

입력 2023-10-05 14:37:58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김동혁 소설가

'관종'은 관심 받고 싶은 욕망이 과한 족속을 지칭하는 신조어다. 너무 튀는 행동이나 사고를 경계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 좋은 어감으로 쓰이는 단어는 아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작가라는 직종에서는 이 '관종적 사고'가 매우 필수적이다.

모든 문학은 결국 소재에 관한 작가의 오랜 관심에서 만들어진다. 작가의 시선이 지목한 한 대상을 소재라고 할 때 그것을 천천히 오래도록 살피는 과정에서 문학은 시작된다. 천천히 오래도록 살피고 싶은 욕망을 소재에 대한 사랑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표면과 이면을 모두 알아가는 과정에서 작가는 소재에 더욱 매료되기도 하고 점차 실망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문학 속에서 작가의 이 매료와 실망의 과정을 읽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창작의 과정에서 관조(觀照)는 서사 즉 이야기에 선행(先行)한다. 관조 없이 문학이 시작될 수는 없다. 장르를 불문하고 작가의 첫 과제는 소재를 '오래 보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오래'는 단순히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玄)'를 의미한다. 깊이 있는 시선 끝에 일상의 소재는 결국 '새롭고 낯선 존재'로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이 문학적 변용은 관조에서 시작되고 그 관조는 '관종적 특성'을 가진 작가에게서 비롯되는 셈이다.

누구나 한 번 쯤은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인가요?'라는 류의 질문을 받아 보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토끼와 거북이'나 '선녀와 나무꾼'의 줄거리를 물어왔다면 우리는 일목요연하게 그 내용을 말해 줄 수 있다. 일단 분량이 짧고 작품이 담고 있는 서사의 구성이 시간의 순서와 동일하기 때문에 줄거리를 재편집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토지'나 '태백산맥'과 같은 대하소설 류의 경우는 분량이 가진 방대함으로 인해 쉽게 줄거리를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가 비교적 명확해 조금 개괄적이기는 해도 상대방을 이해시키기에는 충분한 답변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작품이 가지고 있는 관조의 깊이를 독자가 파악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작가와의 두뇌 싸움에서 최소한 무승부는 기록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청준 선생이나 이승우 작가의 소설은 어떨까? 통상 관념적이라는 평가를 할 수 있는 작품들은 분명 묘한 긴장감 속에서 독서에 빠져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읽고 난 후 명쾌한 정리가 힘들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 작품이 '난해(難解)하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어렵고 쉽고의 문제로 가름할 사항이 아니다. 분명 읽는 동안 재미가 있었는데 도무지 확실한 줄거리가 잡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작가의 시선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과 사물의 본질을 바라보는 작가의 그 시선, 즉 관조가 매우 독특한 것이다.

세상에 내 맘 같은 타인은 없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라고 답답해 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독특하니 작가가 된 것이고 또 그런 능력을 타고 난 것을 어쩌겠는가? 독자는 그냥 읽는 동안이 즐거우면 그만이다. 즐겁지 않은 독서는 가치가 없다. 끝까지 읽어줄 가치가 없다고 생각된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이를테면 평론가 같은 작자들) 그대로 책을 덮으면 그만이다. 여기서 자신만의 평론을 쓰는 주요한 방법도 만들어진다. 명쾌한 작가 의도나 줄거리 혹은 교훈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이 작품을 즐겁게 읽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필력이 된다면 글로 기록해 보자. 그 자체로 독서는 완성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