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영 대구가톨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선거를 통한 권력 교체가 이루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50년이다. 그 오십 성상의 역사의 부침과 민주주의 퇴행에 대한 보상일까? 우리나라는 1987년 민주화 이래 8차례의 대통령선거를 안정적으로 치르고 4번의 권력 교체에 성공했다. 이 빛나는 위업은 후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전무후무하다. 그리고 이제는 중견 민주주의 국가로 도약하는 진입로에 이르렀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공정한 선거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 오직 선거만이 민의를 결집해서 합법적으로 권력을 창출하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쉐보르스키(A. Przeworski)의 통찰을 빌리면 민주주의는 불확실성(uncertainty)을 제도화한 체제이다. 다시 말해 선거라는 권력 형성 게임의 결과는 확정되어 있지 않으며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이를 위해서 게임은 '주기적 선거, 공정한 규칙, 결과의 불확실성, 결과에 대한 승복'으로 구성된다. 이 상식적인 절차를 뿌리내리는 데 반세기 동안 민초들의 투쟁과 무수한 희생이 바쳐진 것이다. 그래서 결과의 불확실성을 반전시키려는 불법과 반칙은 마땅히 응징되어야 한다. 그것이 최소 민주주의의 보루를 지키는 길이다.
그러나 정보통신 혁명이 개막된 2000년대 초입부터 최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중대한 도전이 이어졌다. 첫 주자는 군인 출신의 개인이었다. 김대업은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이 병역을 면탈했다는 거짓 주장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위조된 서류와 테이프가 인터넷신문과 공영방송을 타고 거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자 민심이 요동쳤다. 선거 결과 당선자와 2위 후보 간 득표율 차이는 2.3%포인트에 불과했다. 두 번째 주자는 무소불위의 국가 정보기관이었다. 국가정보원장의 지시 아래 2012년 대선까지 인터넷상에서 조직적인 여론 조작이 자행되었다. 국군 사이버사령부와 기무사령부도 여론 왜곡에 가담했고 경찰은 증거 인멸로 협조했다. 당시 수사 과정에서 좌천된 검사 윤석열은 새 정부에서 이 국기 문란의 적폐를 만천하에 들추어냈다. 세 번째 주자는 인터넷 논객과 대선 후보 캠프였다. 일명 드루킹 일당은 2016년 대선까지 포털사이트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댓글과 검색어를 조작했다. 대규모 댓글 폭격을 가하는 킹크랩 프로그램으로 인해 조작되지 않은 포털 토론장이 없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이들과 공모한 캠프의 대변인 출신 현직 도지사가 수감되면서 소위 촛불 정부의 도덕성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2000년대 대선의 암흑사에서 온라인 공간은 여론 조작의 진원지이거나 연결고리였다. 기실 온라인에 죄를 묻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일이다. 오히려 인터넷과 뉴미디어는 단절된 대중을 연결하며 닫힌사회를 열어젖힌 인류 문명의 기막힌 선물이다. 온라인을 통해 곳곳에서 토론이 벌어지고 여론이 집약되었다. 부조리를 고발하는 청원이 이루어지고 권력의 전횡도 감시되었다. 정치 무관심을 타개하고 선거에서 열띤 지지와 반대도 표출되었다. 멀리 나라 밖으로는 독재에 항거하는 세계 시민의 연대가 펼쳐지기도 했다. 온라인 참여는 잡음이 끊이지 않았으나 폐습과 기득권을 허무는 불가피한 진통으로 관용되었다. 이렇듯 인터넷과 뉴미디어는 민주주의의 기술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열린사회의 적들은 이 은총의 도구를 여론을 조작하고 불확실한 결과를 뒤집는 데 악용하였다. 한 줌 사익을 위해 선거의 정당성과 민주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린 것이다.
최근 대장동 업자가 연루된 전 언론노조 위원장의 인터뷰 이슈가 여론 조작 의혹으로 파급되고 있다. 인터넷방송 뉴스타파는 2022년 대선을 사흘 앞둔 시점에 야당 후보를 대장동 사건의 몸통으로 암시하는 인터뷰를 보도했다. 당시 언론 매체들은 일제히 이를 보도하고 인터뷰 영상은 유튜브를 통해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런데 인터뷰 내용이 허위인 데다 그 대가로 1억수천만 원의 금품이 건네졌다고 한다. 선거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실제 1·2위 득표율 차도 0.73%포인트로 나타났다. 전모가 밝혀지겠지만 네 번째 열린사회의 적들이 등장할 것 같은 기우를 지울 수 없다. 사실이라면 관과 민, 진보와 보수,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어 활보하는 이 불의의 집단에 어떻게 응전할 것인지 근본 해법을 찾아야 한다. 언제까지 최소 민주주의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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