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 초대석] 육군, 송호성 총사령관 지운 이유

입력 2023-09-04 09:33:48 수정 2023-09-04 18:43:15

이정훈 명지대 객원교수

이정훈 명지대 객원교수
이정훈 명지대 객원교수

1948년 8월 15일 정부를 세운 우리는 그해 10월 '국군조직법'을 만들어 미 군정이 통제해 온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를 육·해군으로 출범시켰다(공군은 이듬해 10월 육군 항공부대로 창군). 초대 육군 총사령관엔 송호성, 해군 총사령관엔 손원일 준장이 임명됐다.

유럽에서 항해사를 하며 2차 대전을 지켜본 손원일이 해방 후 해방병단을 만들었다. 그는 음악 교사를 한 부인 홍은혜의 작곡으로 해군 최초 군가인 '해방(海防)행진곡'과 '바다로 가자'도 지었다. 이 병단이 미 군정의 해안경비대를 거쳐 해군이 됐다. 그의 부친 손정도 목사는 대한민국 임정의 임시의정원(국회에 해당) 의장을 지냈다. 그렇기에 해군은 1천800t급 잠수함 1번 함을 '손원일함'으로 명명해 그를 기린다.

정부를 세우려면 헌법부터 만들어야 한다. 미 군정은 헌법을 만들 국회의원을 뽑는 1대 총선을 1948년 5월 10일 하기로 했다. 그 한 달여 전인 4월 3일 제주에서 이 선거에 반대하는 강한 시위가 일어났다. 그 1년 전인 1947년 3월 1일엔 남로당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해 유혈 사태를 빚었다.

경찰로는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미 군정은 제주 총선을 포기하고 제주 주둔 9연대를 출동시켰다. 그 시기 국방경비대에 좌익이 대거 입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작전에 나선 9연대에서 대규모 탈영이 일어나 시위대에 참여했다. 미 군정은 9연대를 해체하고 11연대를 만들었다. 11연대장 박진경 중령은 적극적으로 작전했다. 1대 총선으로 뽑힌 제헌의회가 헌법을 만들던 6월 18일, 남로당 노선을 따르던 문상길 중위가 박 연대장을 암살했다.

체포된 문 중위는 9월 23일 건국 후 최초로 총살형을 받은 군인이 됐다. 그런데도 제주 사태는 안정되지 않았기에 그해 10월, 대한민국은 여수에서 막 창설된 14연대에 출동을 명했다. 14연대가 제주행 배에 타려고 한 10월 17일, 지창수 상사 등이 연대 지휘부 21명을 사살하며 거부 투쟁을 일으켰다. 본토에서 일어난 군사 반란에 놀란 대한민국은 송호성 육군 총사령관을 토벌 전투 사령관에 임명해 현지로 가게 하고, 2(대전)·3(전주)·4(광주)·5(부산)·6(대구)·15(마산)연대 등을 동원케 했다.

그런데 먼저 출동한 4연대 선발대가 이진범 상사 등의 주도로 지휘부를 사살하고 14연대에 합류했다. 그런데도 송 사령관은 온건 진압을 주장하며 10월 24일 여수로 들어가다 반란군의 기습을 받아 고막이 터지는 부상을 입었다. 그 즉시 대한민국은 최초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력한 반공 의식을 가진 만주군 장교 출신 원용덕 대령과 김백일 중령을 지휘관으로 투입했다.

육군은 14연대와 4연대를 영구히 없애기로 했다. 4자는 공산주의와 관련 있다고 보고 4자를 넣은 부대는 아예 만들지 않기로 했다. 12월엔 부상당한 송 사령관을 대신해 일본 육군 대좌 출신 이응준 준장을 육군 총참모장(총사령관에서 총참모장으로 개칭)에 임명했다. 동시에 육군에 숨어 있는 좌익을 색출하는 숙군을 해, 80여 명에게 사형, 15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랬음에도 이듬해인 1949년 5월 4일 밤과 5일 새벽 사이, 38선을 지키던 6여단의 1·2대대장인 표무원·강태무 소령이 자기 대대원 거의 전원을 이끌고 월북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이는 육군에 숨어 있던 공산 세력의 마지막 도주이기도 했다. 덕분에 6·25전쟁을 당했을 때 육군은 무능했는지는 몰라도, 적에 마구 투항하는 비겁함은 보이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송호성을 새로 만든 예비군 부대인 호국군 사령관 등에 임명했다. 광복군 출신인 송호성을 끝까지 대우한 것. 그랬건만 송호성은 6·25 직후 서울이 함락됐을 때 국군을 따라 월남하지 않았다.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직전에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갔다. 그리고 의거 입북자 부대의 사단장을 하고 노동신문에 글을 쓰다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이 때문에 육군은 송호성을 까맣게 지웠다. 창군 석 달 뒤인 1948년 12월 15일 총참모장이 된 이응준을 최초의 육군 지휘관으로 해 놓았다. 그때의 육군은 정말 참혹했다. 육군은 육군이 공산화됐으면 대한민국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육군이 소련 공산당원이 된 홍범도를 거부하는 데는 이런 내력이 깔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