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회의원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 3일 "아직도 냉전적 사고에서 못 헤어났다"며 윤석열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했다. 타깃을 분명히 밝히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전직이 현직을 비판한 모양새다.
기이한 점은 그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당당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20여 년 전 햇볕정책 시기에야 워낙 정보의 한계가 심각해 북한의 의도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이제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입장에 서서 아무리 주판을 튕겨 봐도 핵을 쉽게 포기할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한민국 대통령은 전 세계에 대고 김 위원장의 비핵화 진정성을 보증 섰고, 종전 선언까지 주장했다.
만약 내가 문 전 대통령이라면 부끄러워 머리를 못 들 것 같다. 비핵화는커녕 북한이 남쪽을 향해 불꽃놀이하듯 미사일을 쏴 대고 있으니, 국가 안보와 북핵 문제에 대해 절대로 당당할 수 없는 이가 바로 문 전 대통령이다.
결과가 실패라는 것만으로 그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과정은 더 문제였다. 국가의 안위를 어깨에 짊어진 최고 지도자가 무슨 이유로 김정은의 속마음을 보증 섰는지 아무리 곱씹어 봐도 모를 일이다. 아홉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인데 말이다. 더구나 그는 UN까지 가서 종전 선언을 주장했다. 우방들 모두 북한 비핵화를 전제로 했을 때만 평화 체제 구상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는데, 가장 신중해야 할 우리나라 대통령이 혼자 급발진을 해 주변을 놀래킨 것이다. 종전 선언을 할 경우, 유엔사령부가 해체될 것이고, 그 결과 현재의 집단방위 체제가 약화될 것이 뻔한데도 말이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리 했는지 이때껏 우리 국민은 속 시원한 설명이나 사과 한마디 못 들었다.
그가 얼마나 객관적 평가에 귀 막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당당한지는 노무현 정권에서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의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문재인 정권의 외교에 대해 지난 3일 그는 "대북 성과에만 매달리며 일방적 평화를 되뇌는 동안 우리 안보의 대들보인 한미동맹이 흔들렸고, 70년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양국 관계가 냉랭했다"고 비판했다. 전문 외교관의 시각에서 보자면, 상대의 의도를 읽고 전략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외교 전쟁에서 혼자만의 낭만적 열정에 사로잡혀 동맹의 신뢰만 잃어버린 맹추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는 문 전 대통령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북 관계의 원칙이 무엇인지는 정치적 진영 간에 너무나 큰 간극이 존재한다. "통일부가 더 이상 대북지원부여서는 안 된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거세게 비난하는 야당을 보면, 통일부가 계속 대북지원부여야 하며, 같은 민족이라면 응당 김정은 정권과 잘 지내기 위해 간도 쓸개도 절제해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자마자 서독은 동독 정권의 인권침해 행위를 추후에 형사소추하겠다며, 잘츠기터에 중앙조사처를 설립했다. 철조망 근처의 사살 등 4만 건이 넘는 범법 행위를 기록했다. 잘츠기터의 존재만으로도 국경수비병들은 탈주자들을 정조준하지 않고 총을 비켜 쐈으며, 많은 정치범의 고문이 자제됐다. 서독의 '인권 존중' 원칙이 동독 주민에게 마지막 희망의 불빛이 된 것이다. 훗날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동독에 제공하면서도 서독은 '개방과 교류 확대' '인권'이라는 조건을 항상 달아 통일의 방향성과 원칙을 견지했다.
"헌법 정신을 따라 자유 민주 기본 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추구할 것이며 북한 인권을 보다 중시하겠다"는 대통령실의 입장은 너무나 당연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야당을 비롯한 각계의 논란이 뒤따를 전망이다. 만시지탄이지만 반갑다. 대북 관계 개선을 위해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과연 희생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짚어야 할 때이다. '수틀리면 숙청 대상을 재판도 없이 공개 처형해 버리는 독재정권'을 지금의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통일을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교류와 협력 속에서도 그들의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방향성을 뚜렷이 할 것인지를 제대로 질문하고 답해야 한다. 이는 사실 우리 스스로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의 원칙을 정말 소중히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공존'이란 허울 속에, 지구상에서 가장 가혹한 북한 독재체제를 슬며시 인정하고 남북이 하나 되는 길로 향하자는 김대중·문재인표 통일관과 제대로 이별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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