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연구자
근대기 대구의 사군자화가 긍석 김진만이 대나무와 괴석을 그린 '죽석도'다. 김진만은 1916년 독립군 군자금 마련을 위해 대구권총사건을 벌인 독립운동가다. 8년 3개월 18일이라는 김진만의 투옥기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중 화가로는 가장 긴 기간일 것이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김진만은 출옥 후 뜻밖에 사군자 화가의 길을 가게 된다. 여러 요인이 작용했겠지만 일경의 감시와 탄압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활동이 어려웠다는 점이 컸다. 김진만은 한시와 서예에 익숙한 전통 지식인이었고, 시서화 삼절의 유명 서화가인 석재 서병오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당시 지역사회의 미술 열기 등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대구에서는 1922년 대구 최초의 미술인 모임이자 서예와 사군자를 가르치는 교육공간인 교남시서화연구회가 서병오를 회장으로 발족됐다. 교남은 곧 영남이다. 노소(老少)의 서화가들이 함께 연구하며 문화발전을 도모한다는 취지였으므로 회원은 서화가였고, 동정금(同情金)을 기부하면 찬조회원, 강습생은 특별회원으로 대우했다. 서병오라는 대가의 존재가 구심점이 되고 지역사회의 시서화 애호가 뒷받침되어 이 모임이 나타났다. 김진만이 출옥하기 2년 전이다.
1910-20년대는 대구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서화강습소가 나타나며 사군자, 서예 붐이 일어난 시기다. 비록 나라를 빼앗겼지만 문화적 자존을 전통미술로써 지키려했던 시대적 분위기가 있었고, 여기(餘技), 묵희(墨戱)로 여겨지던 사군자가 교양의 차원에서 미술의 한 전문 분야로 인식되며 직업적으로 또는 비직업적으로 붓을 잡는 사람들이 많았다.
교남시서화연구회가 결성된 이듬해,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인 1923년 대구의 전 분야 미술인들이 합심한 대규모 '미술전람회'가 노동공제회관에서 열렸다. 서예와 사군자, 수채화와 유화, 고서화 등 세 분야 미술품이 6일간 전시되며 매일 오륙백 명이 관람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1920년대는 서화가, 서양화가, 소장가가 모두 빛났던 대구미술의 첫 번째 전성기다.
김진만은 길지 않은 화가로서의 생애 동안 매난국죽, 괴석, 화훼, 기명절지 등 사군자류를 고수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허심우석(虛心友石), 죽군석우(竹君石友)라는 말이 있듯 잘 어울리는 두 군자를 그리는 죽석화는 대구화단에서 애호된 주제다.
제화에 "사죽가(寫竹家) 기법불일(其法不一) 기공어사(其工於斯) 가지(可知) 차법지난이(此法之難易) 긍석(肯石)"이라고 했다. 묵죽이 단순한 것 같지만 화법이 하나같지 않은 것에서 어려움을 알 수 있다는 말로 이 '죽석도'의 특별한 구도와 자신의 죽법에 대한 자부를 은근히 드러냈다.
여름은 대나무의 꿋꿋한 기운이 더욱 후련한 계절이다. 금요일이 대나무 심는 날인 죽취일(竹醉日)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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