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애 화가
계획은 대체로 변경된다. 그게 계획이다. 세상살이에서 계획한 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될까. 6월은 올 초에 세운 계획을 수정하는 달이다. 이미 지난 것은 어쩔 수 없고 반 남은 시간만큼은 잘 보내기 위해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매년 초마다 나는 회화론을 써서 출간해야지 하고는 12월을 맞이했다. 올해도 그럴 가능성이 하루하루 높아지고 있다. 계획을 꼭 실천에 옮겨야겠다고 다시 다짐해보는 오늘이다. 미술에서 계획과 실천에 관한 이야기다.
미술에서 계획은 중요하다. 계획의 중요성은 데생(dessin)의 어원에서도 찾을 수 있다. 프랑스어 명사인 데생은 동사로 '데생한다'의 의미인 데시네(dessiner)다. 데시네는 disegnare(이탈리아어) 또는 designare(라틴어)에서 파생된 걸로 알려져 있다. 둘 다 사물의 윤곽을 표기한다는 의미의 말이다. 각설하고 이들 단어에서 철자가 유사한 영어 단어가 연상되지 않는가. 바로 계획, 의도의 뜻을 가진 디자인(design)이다. 여기서 다시 주목할 점은 de에 붙은 sign이다. 기호(sign)는 내면에 있는 것이 외재화한다는 의미를 가리킨다. 쉽게 말하면 머릿속 생각을 밖으로 꺼내는 일이 미술의, 소묘의 중심 개념이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미술에서 계획이 실천으로 곧이곧대로 이행되는 일은 적다. 오히려 계획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경우가 더 많다. 학문의 이론과 실천에 괴리가 있듯이 작품 구상과 작품 제작은 일치하지 않는다. 이유는 분명하다. 아무리 주도면밀하게 세세한 것까지 신경을 쓴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머리로 현실의 복잡성을 모두 상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작품 전시이다. 아무리 철저하게 전시 계획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정작 실제 전시 공간에서는 무수한 변수를 만나게 된다. 그러한 예기치 못한 문제 상황에서 얼마나 능숙하게 융통성 있게 계획을 변경하고 최선을 선택할 수 있는가. 이것이 작품 전시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이제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처음 세운 작품 제작 계획을 얼마나 실천했을까. 요즘 학생들은 계획의 변경보다 준수를 중시하는 것 같다. 특히 몇 점의 작품을 제작할 것인가 하는 수량 계획은 비교적 잘 지킨다. 나로서는 도통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나는 작품을 제작하다가 중간에 새로운 발견이 있어서 더 많이 시도해본다거나 하는 그런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탐구심이 결국 발전을 만들고 자기다운 표현, 형식, 태도가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콜링우드(R. G. Collingwood)는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은 미술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즉 미술은 미술적 과정의 산물로 계획과 결과가 일치하는 공예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는 말이다. 물론 실현이 가능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어림없는 계획은 계획이 아니다. 하지만 과감하고 도전적인 계획이 아니라 이 정도면 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근성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심 학생들이 자기 한계를 넘어 향상심을 발휘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하면 꼰대라 불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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