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이 발굴한 역사 현장…기억·보존해야 할 '대구 정신'

입력 2023-05-28 21:01:11 수정 2023-05-28 22:20:20

[세계유산 대구 2·28 기록물] 그 의미와 남은 과제는
1960년 2월 28일, 일요 등교 거부…지역 8개 고교생 수백명 시위 나서
독재정권 불의 항거 역사적 신호탄
본사 주도로 2·28 기록물 속속 발견
4·19혁명까지 과정 담은 사진집, 당시 촬영 필름 원본 일부 찾아내

1960년 2월 29일자 매일신문 3면. 대구 고교생들이 28일 일요 등교지시에 항의하며 데모를 벌인 과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매일신문 DB
1960년 2월 29일자 매일신문 3면. 대구 고교생들이 28일 일요 등교지시에 항의하며 데모를 벌인 과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매일신문 DB

대구 2·28학생민주운동 기록물(이하 2·28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로 2·28기록물이 재조명되고 있다.

2·28학생민주운동 당시와 이후 언론을 중심으로 수많은 기록물이 생산됐는데 세계기록유산 등재와 별개로 사료가치를 엄밀히 평가하는 노력과 함께 국가차원에서의 체계적인 관리시스템 도입이 졸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록 속 대구2·28학생민주운동

1960년 2월 28일(일요일) 하오 0시19분(오후 12시19분)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 일행이 대구역에 도착했다. 장 부통령 후보는 역전 광장 인파를 헤치고 중앙통(로) 입구까지 걸어와 택시를 타고 수성천변 강연장으로 향했다/(1960년 2월 29일자 매일신문 1면).

이날 영화 관람을 이유로 등교를 해야 했던 경북고(대봉동) 학생들은 하오 1시 5분 쯤 돌연 교문으로 쏟아지기 시작, 반월당을 거쳐 중앙통으로 내리 쫓아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했다. 학생들은 도청 광장(경상감영공원)에 돌입 "학생인권을 옹호하자, 학원내 정치세력을 배제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하오 1시 30분부터 경찰은 학생 체포에 나섰고 상호간에 피를 흘리기까지 했다/(29일자 동 신문 3면).

1960년 2월 29일자 매일신문 3면에는 전날 일요 등교지시에 항의하는 대구 8개 고교생들의 데모 소식으로 가득했다. 제4대 정·부통령 선거(3월 15일)를 앞두고 27일(토) 자유당 강연회에 이어 28일(일)은 민주당 장 부통령 후보 첫 대구 강연회가 예정된 날이었다. 일요 등교지시는 이 강연회 참석을 막기 위해 내린 당국의 조치였다.

1960년 2월 28일 경북고 학생들이 경북도청 광장에 진출해 항의하는 모습.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2·28학생민주운동 기록사진 5점 중 1점으로 매일신문 아카이빙센터에서 최근 이 사진 필름 원본을 발굴했다. 매일신문 DB
1960년 2월 28일 경북고 학생들이 경북도청 광장에 진출해 항의하는 모습.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2·28학생민주운동 기록사진 5점 중 1점으로 매일신문 아카이빙센터에서 최근 이 사진 필름 원본을 발굴했다. 매일신문 DB

'경고생 수백명이 데모','대고생 시위는 좌절' 제하 기사에서는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시위, 경찰과 충돌, 1백여 명 검거 과정 등을 사진과 함께 상세히 다뤘다.

'토끼 사냥·체육회 등 28일 일요일에 등교' 제하 기사에는 대구여중 체육대회, 제일여중 임시수업을 비롯해 각 국민(초등)학교에서도 보충수업을 했다고 적었다.

제일모직, 대한방직 ,내외방직, 연초제조공장 직원들도 일요일 전원 출근했다. 2군사령부에서는 배구와 씨름대회, 시내 육군극장에서는 각 부대 대항 노래자랑이 열렸다.

당시 신현국 매일신문 사진기자는 "우리 사진기자는 오후 1시 반경에 (데모대가) 중앙통, 우리 신문사(남일동) 앞을 지날 때야 비로소 알게 됐다(중략). 그 당시 우리 기분으론 한 사건도 빼놓지 않고 다 찍어 놓겠다는 것이고 통쾌감이 절로 났다(중략)" 고 증언했다.(1960년 6월 17일 연세대 안병준 학생의 신현국 면담 자필 기록).

2·28학생의거는 단 하루였지만 그것은 시작이었다. 불의에 항거하는 역사적 신호탄이었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 하에 일찍이 없었던 거사였다. 3·15 마산 부정 선거 항의, 4·19 혁명의 도화선으로, 12년 이승만 장기집권에 종지부를 찍고 마침내 민주정부를 세우게 한 초석이었다.

매일신문 아카이빙센터 자료실에서 발굴한 2·28 당시 촬영 필름 원본. 필름(아래)에는 경북고생들이 도청 광장에서 항의하는 모습(위 왼쪽)과 이날 밤 경찰이 야간 데모를 벌인 사대부고생 검거에 나선 장면(위 오른쪽)이 담겨 있다. 매일신문 DB
매일신문 아카이빙센터 자료실에서 발굴한 2·28 당시 촬영 필름 원본. 필름(아래)에는 경북고생들이 도청 광장에서 항의하는 모습(위 왼쪽)과 이날 밤 경찰이 야간 데모를 벌인 사대부고생 검거에 나선 장면(위 오른쪽)이 담겨 있다. 매일신문 DB

◆세계기록유산, 대구2·28학생민주운동 기록물

63년이 지났지만 2·28 관련 각종 기록물이 속속에 발굴되고 있다.

매일신문사에서도 최근 2·28 관련 귀중한 자료를 발굴했다. 사진과 필름 수 백만 컷이 보관된 아카이빙센터 자료실에서 지금까지 행방을 알 수 없었던 2·28 당시 촬영 필름 원본 일부를 찾아냈다. 이 필름에는 경북고생들이 도청 광장에 진출해 항의하는 모습과 이날 밤 경찰이 야간 데모를 벌인 사대부고생 검거에 나선 장면이 담겨 있다.

또 4·19혁명 직후 1960년 7월 10일 발행한 '승리의 그날' 사진집과, 사진집 출판 당시 원본 사진 수십 장을 발굴했다. 사진집은 대구 2·28학생의거- 마산 3·15 부정선거 항의-부산·대구·서울에서 벌어진 4·19혁명-이승만 대통령 하야까지 전 과정을 160여 장의 사진으로 엮은 기록물이다.

최근 매일신문사가 발굴한 4·19혁명 직후인 1960년 7월 10일 발행한
최근 매일신문사가 발굴한 4·19혁명 직후인 1960년 7월 10일 발행한 '승리의 그날' 사진집과 발행 당시 편집한 원본 사진. 매일신문DB

지난해 대구MBC는 2·28특집 프로그램 제작(윤창중PD) 과정에 영국 더 타임즈 찰스 하그로브 일본 특파원이 2·28 학생의거 직후 경북고 유권재 학생 인터뷰를 실은 1960년 3월 15일자 지면을 입수하기도 했다.

그동안 알려진 2·28기록물도 적지 않다.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아카이브실에는 주요 기록물 100여 건이 수집,보관돼 있다. 매일신문사가 소장 중인 신문 지면과 기록 사진을 비롯한 각 언론사 취재 보도물, 당시 취재기자 증언, 운동 참가 생존자 증언, 각종 출판물 등을 포함하면 그 수는 수백 건이 넘는다. 이 기록물은 국내 각 기관 단체에 개별 소장, 보관돼 있는 상태다.

1960년 7월 10일 발행한
1960년 7월 10일 발행한 '승리의 그날' 사진집에 게재된 대구 2·28 학생의거 당시 현장 사진. 매일신문DB

◆2·28 기록물 남은 과제는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2·28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자랑스런 일이다. 2017년 먼저 등재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과 함께 대구의 시민정신을 대표하는 큰 자산이다.

국채보상운동, 대한민국 민주화의 첫 신호탄 2·28학생민주운동 모두 대구에서 시작됐다. 그 배경에는 불의에 항거하는 선비정신, 높은 교육열, 부당한 정권에 비판을 서슴치 않았던 언론매체 등 당시 '야도(野都) 대구'의 올곧은 사회 문화가 바탕이 됐다는 평가다.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계기로 2·28기록물을 적극 발굴하고 흩어진 자료를 모아 통합 관리하는 아카이브 구축과 함께 역사현장으로서의 중앙로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중앙로는 2·28학생민주운동을 펼친 바로 그 현장이다. 4·19 혁명 당시 수만 명의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내일의 희망을 약속했던 현장이다. 대구역 광장에서 반월당에 이르는 거리는 이후에도 각종 집회와 퍼레이드를 벌인 단골 장소였다. 나라가 위태로웠던 시절엔 학도호국단이, 수 십만 시민이 이 거리에서 반공을 외쳤다.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대구 6월 항쟁의 열린 공간이었다.

1917년 일제가 중앙통(로)을 열었지만 그 길 위에 시민들은 자랑스런 정의의 꽃을 피워냈다. 중앙로는 대구의 '민주거리'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중앙로가 자랑스런 대구 역사 현장으로 거듭난다면 쇠락해 가는 도심을 되살리는 해법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