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세계사]찰스 3세 즉위, 버지니아와 뉴욕 탄생의 비화

입력 2023-05-12 14:30:00 수정 2023-05-12 20:06:20

英 찰스 3세, 왕세자 시절 '웨일즈 왕자'로 불린 이유는?

영국 찰스 3세 왕이 지난 6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식을 가졌다.로이터 통신
영국 찰스 3세 왕이 지난 6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식을 가졌다.로이터 통신

지난 6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새로운 영국왕이 즉위식을 가졌다. 찰스 3세. 세계 최강을 일궜던 대영제국의 위상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영국은 무시못할 선진국이자 강대국이다. 면적이 24만㎢이니까 우리의 10만㎢보다 2배 반 가까이 넓다. 인구도 6천8백만명이니까 우리보다 1천7백만명이 더 많다. GDP도 3조2천억달러 규모로 세계 5위다.

우리의 1조 8천억 달러보다 2배 가깝다. 지금도 영국왕은 14개 영연방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다. 서구사회 찰스라는 이름을 가진 왕들, 그리고 영국에서 찰스 1,2세 치세기에 벌어진 흥미로운 사건들을 살펴본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2023년 5월 6일 찰스 3세 대관식이 치러진 장소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2023년 5월 6일 찰스 3세 대관식이 치러진 장소다

◆영국 찰스, 프랑스 샤를, 독일 칼, 스페인 카를로스

영국 '찰스(Charles)'가 프랑스로 가면 '샤를'이다. 'ch'를 'ㅅ'으로 발음하고, 단어 끝에 오는 자음을 발음하지 않기 때문이다. 843년 베르덩 조약을 통해 프랑크 왕국이 동프랑크(독일)와 서프랑크(프랑스)로 갈라지며 생긴 독일에서는 '카알(Karl)'이다. 'r'이 장모음 뒤에서 약화돼 거의 발음되지 않기 때문이다. 800년 로마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 칭호를 얻은 프랑크 왕을 프랑스에서 샤를, 독일에서 카알이라고 부른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10세(1824-1830)까지 10명의 샤를 왕이 있었다. 스페인어는 '카를로스(Karlos)'다. 카를로스 1세(1516-1556)는 1522년 마젤란의 세계 일주를 성공시키며 해상왕국 포르투칼의 지위를 가져온 군주였다.

카를로스 1세의 통치지역은 외조부모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2세로부터 스페인과 아메리카의 광대한 식민지, 나폴리와 시칠리아, 아버지를 통해 합스부르그 왕가의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까지였다. 아들 필리페 2세 때 1565년 필리핀을 식민화해 스페인은 지구상 첫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됐다.

◆찰스 3세, 영국 역사 최장수 왕세자(Prince of Wales)

찰스 3세는 1948년생, 75세다. 외할아버지 조지 6세가 57살인 1953년 사망한 점에 비추면 늦깎이 왕이다. 2022년 96세로 작고한 모후 엘리자베스 2세가 무려 70년 왕위를 지켰기 때문이다. 프랑스 절대왕정을 구축한 태양왕 루이 14세는 72년간 왕위를 유지해 엘리자베스 2세의 치세를 넘는다.

2021년 죽은 찰스 3세의 부친 필립공은 1921년생이어서 100살을 살았다. 그리스 왕실 출신이다. 모후 엘리자베스 2세는 독일계 왕실 혈통이어서 찰스 3세는 다문화 가정출신이다. 찰스 3세는 10살 때 1958년 왕세자가 됐다. 무려 65년간 왕세자 자리에 있었다.

웨일즈 카디프 성. 영국왕의 큰 아들로 차기 왕위 계승자를 웨일즈 왕자(Prince of Wales)라고 부른다. 웨일즈를 정복한 기념으로 1301년부터 사용됐다.
웨일즈 카디프 성. 영국왕의 큰 아들로 차기 왕위 계승자를 웨일즈 왕자(Prince of Wales)라고 부른다. 웨일즈를 정복한 기념으로 1301년부터 사용됐다.

영국에서는 왕세자를 웨일즈 왕자(Prince of Wales)라고 부른다. 1066년 프랑스 노르망디 공작인 정복왕 윌리엄이 영국을 접수했지만, 서부의 웨일즈 지방은 정복하지 못했다. 에드워드 1세가 1277년부터 1283년 웨일즈를 손에 넣었다. 웨일즈가 확실한 영국 영토라는 것을 상징하는 조치로 1301년부터 사용한 이름이다. 이제 영국 웨일즈의 왕자는 찰스 3세 맏아들 윌리엄이다.

웨일즈의 수도 카디프 시내 표지판. 웨일즈는 켈트족의 후예여서 말이 영어와 다르다. 영어표기와 병기된 표지판.
웨일즈의 수도 카디프 시내 표지판. 웨일즈는 켈트족의 후예여서 말이 영어와 다르다. 영어표기와 병기된 표지판.

◆'독신' 엘리자베스 1세, 미국 '버지니아' 이름 기원

에드워드 1세가 웨일즈를 차지하고 300여년이 흐른 뒤, 튜더 왕조의 엘리자베스 1세는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찔렀다. 엘리자베스 1세의 치적 가운데 해외 진출이 돋보인다. 1583년 험프리 길버트 경이 캐나다 뉴펀들랜드를 탐험했다. 그의 동생 월터 랄레이는 남쪽으로 내려가 미국 버지니아 유역에 도착했고, 1585년 영국의 첫 해외 식민지를 만들었다.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

그리고 독신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기려 'Land of Virgin(처녀의 땅)'이란 이름 버지니아(Virginia)로 작명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영국의 첫 해외 식민시 건설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1600년 12월 31일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를 설립해 인도와 중국 무역을 확대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1603년 70살로 죽으면서 튜더왕조는 문을 닫았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성. 스튜어트 왕조는 스코틀랜드에서 왔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성. 스튜어트 왕조는 스코틀랜드에서 왔다.

스코틀랜드로 시집간 엘리자베스 1세의 고모 마가렛 튜더의 증손자로 스코틀랜드 왕이던 찰스 제임스 스튜어트(엘리자베스 1세의 조카손자,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가 영국왕이 됐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영국 스튜어트 왕조 제임스 1세다.

◆제임스 1세, 메이 플라워호 식민지 건설 모범

제임스 1세 즉위 4년 뒤, 1607년 5월 버지니아에 식민촌 건설의 꿈을 실현시켰다.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따 제임스 타운이라 이름 붙인 식민촌은 1610년 일시 폐쇄되지만, 곧 재개돼 영국 해외 식민지 개척의 선봉역을 맡았다.

이후 급진적 교회 개혁을 원했던 청교도 35명을 포함해 102명의 이주자들이 1620년 9월 6일 영국 플리머스 항을 출발해 66일 만에 뉴잉글랜드 매사츄세츠에 도착했다. 뉴펀들랜드와 버지니아 사이다. 메이플라워 서약을 맺은 성인 41명 가운데 정착에 성공한 이민자들은 이후 식민시 수립의 모범이 됐다.

올리버 크롬웰 초상화
올리버 크롬웰 초상화

◆찰스 1세, 단대두서 목잘린 유일한 왕

제임스 1세가 1625년 죽고 아들 찰스 1세가 등극했다. 찰스 1세는 의회와 불화를 일으키고, 왕권신수설에 심취해 절대왕정을 고집했다. 1642년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고, 영국은 의회파와 왕당파간 내전에 휘말렸다. 의회파에 올리버 크롬웰이라는 탁월한 지도자가 나타나 철기군을 이끌고 왕당파와 스코틀랜드 응원군을 물리쳤다. 1649년 왕정을 종식시키고 공화국을 세웠다. 찰스 1세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아들 찰스 2세가 스코틀랜드로 가 군대를 이끌고 왔지만, 1651년 패배했다.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내전은 종식됐다. 크롬웰은 1653년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통합한 영국 공화국(Commonwealth of England)을 만든 뒤, 3국을 관할하는 호국경 자리에 올랐다. 1658년 크롬웰이 59살의 나이로 죽으면서 공화국이 흔들렸다.

약해진 지도력에 국정이 혼란에 빠졌다. 의회는 1660년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파리에 있던 찰스 2세를 불러 왕정제를 부활시켰다. 영국의 공화국 전통은 11년 만에 막을 내렸다.

영국 국회의사당. 영국은 제임스 2세 통치기간 명예 혁명을 통해 의회권력이 국왕의 권력에 앞서는 민주혁명에 성공하고 의회중심의 민주정치를 펼치고 있다.
영국 국회의사당. 영국은 제임스 2세 통치기간 명예 혁명을 통해 의회권력이 국왕의 권력에 앞서는 민주혁명에 성공하고 의회중심의 민주정치를 펼치고 있다.

◆찰스 2세, 지구촌 최대 경제 문화 도시 뉴욕 탄생

찰스 2세 통치 초기 1665년 런던에 페스트가 유행해 45만 인구 가운데 7만5천여명이 죽었다. 1666년에는 대화재가 발생해 런던 핵심부가 대부분 불탔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포르투갈 출신 왕비 사이에 자식을 두지 못한 점. 찰스 2세는 17명의 혼외자를 낳았지만, 왕위 계승 자격이 있는 적자를 두지 못해 1685년 55살로 죽으면서 동생 제임스 2세에게 왕위를 넘겼다.

찰스 2세 재임 기간 현대 지구촌 최대 경제, 문화 도시 뉴욕을 건설했다. 당시 북아메리카 동부는 맨 위부터 뉴펀들랜드 영국, 아카디아(노바 스코샤) 프랑스, 뉴잉글랜드 영국, 뉴욕 네덜란드, 버지니아(캐롤라이나 포함)오 조지아 영국, 플로리다 스페인 차지였다. 뉴욕을 신생 독립국 네덜란드 모피상들이 1624년부터 개척했다.

맨하탄과 그 핵심 월스트리트는 네덜란드 사람들 작품이다. 이름도 고국 수도를 따서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렀다. 영국이 이곳을 전쟁으로 빼앗은 거다. 1664년 당시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 2세를 기념해 뉴욕(New York)으로 명명했다. 왜 뉴욕이 됐을까?

◆영국 왕의 둘째 아들, 요크 공작(Duke of York)

영국 왕의 둘째 아들을 요크 공작(Duke of York)으로 부른다. 영국 북부 대도시 요크는 로마시대 에보라쿰(Evoracum)으로 번영했다. 이후 앵글로족이 들어왔고, 색슨족이 에포르윅(Eoforwic)으로 불렀다. 이어 866년 덴마크에서 쳐들어온 바이킹이 정복한 뒤, 요르빅(Jorvik)으로 개칭해 964년까지 통치했다. 이후 영국이 다시 차지하며 1385년부터 왕의 둘째 아들에게 요크 공작 작위를 줬다.

뉴암스테르담을 빼앗은 영국인들이 당시 요크 공작 제임스 2세에게 헌정하며 새로운 요크라는 의미로 뉴욕이라 부른 거다. 뉴욕의 주인공 제임스 2세 때 1688년 영국 의회는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에게 왕권을 넘기면서 왕권보다 의회 권한이 앞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타협으로 합의를 이뤘다는 점에서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이후 영국은 민주주의 전통 아래 세계 최강의 해가 지지않는 나라를 일궜다.

역사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