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애 화가
미술이 사고 활동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미술이 감정을 일으킨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감정은 매우 인간적인 자연스러운 심리 현상이다. 인간 보편의 것, 그것과 미술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카미유 모네의 죽음'(1879)은 자기 아내 카미유가 생을 마감한 직후에 모네가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슬픔 속에서 어떻게 붓을 잡을 수 있었을까. 보통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 그림은 모네가 화가로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는 걸로 읽힌다. 좋게 말해서 말이다. 모네가 위대하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 일화는 화가가 감정을 대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수잔 랭거에 따르면 '예술이란 하나의 가상이다'(S. Langer·1957). 여러분의 눈앞에 그림이 하나 있다. 그 그림에는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림의 인물이나 의자가 정말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상이라는 걸 이해하면서 그려진 것을 받아들인다. 이는 구체적인 것이 전혀 없는 추상적인 그림에서도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어떤 그림이든 결국에는 물감(물질)이 표면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수잔 랭거는 예술 창작의 목적이 인간 감정의 본질을 표현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예술이 인간 감정의 본질을 표현한다고 할 때 감정이란 화가가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화가에 의해 객관화된 감정, 인식된 감정이다. 비극을 쓰기 위해 비극에 빠져 있을 필요는 없듯이 화가는 감정에 젖은 상태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일단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만일 화가가 추스를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감정에 빠져 있다면 오히려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네가 아내의 죽음이라는 감정을 대하는 방식이 갑자기 잘 이해된다. 즉 화가는 감정을 객관화한다.
며칠 있으면 어버이날이다. 2000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립다. 당시 나는 교환유학생 신분으로 나가사키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해 3월 나가사키로 떠나는 날 이른 아침, 나를 기차역에 오토바이로 태워주자마자 아버지는 참외 이불 걷으러 가야 한다고 쌩하니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가셨다. 그게 마지막이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뭐가 어떻게 됐는지 거의 잊었고, 아버지가 땅으로 돌아가시는 순간 큰오빠가 울던 그것만 뚜렷하게 기억한다.
장례가 끝나고 나는 한일교류전 때문에 나가사키로 직행했다. 그 교류전에 나는 내 머리카락을 천에 꿰맨 작품을 출품했다. 이 작품은 아버지를 잃기 전에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다. 머리카락이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나는 교류전 동안 주로 통역을 했다. 잘했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별다른 기억이 없는 걸 보면 무사히 마쳤다는 건 분명하다. 이 일을 계기로 내가 화가의 일을 잘 이해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화가가 감정을 대하는 태도를 말이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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