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은 놔두고 반공만 지웠다
북한, 소련 군정이 청산 출발점…죄 판정하는 법령·재판관 없어
반공·민족주의 세력 탄압하고 공산정권 저항하면 '친일' 딱지
윤석열 대통령이 방일하여 한일관계 정상화 활동을 벌이고 귀국한 후 필자가 거주하는 지역의 모 국회의원이 '친일파=일본 간첩'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내걸어 화제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곳곳에는 '윤석열 정권 이완용의 부활인가', '친일매국 윤석열은 퇴진하라', '일본 간첩 윤석열 대통령실을 압수수색하라'는 현수막이 일제히 걸렸다.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진 공격무기가 된 친일 문제가 뜨거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시기는 해방 직후였다. 일본이 물러갔으니 그들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부역자에 대한 응징이 제기된 것이다.
그런데 통감부 시절까지 합쳐 40년 총독부 통치 과정에서 협력자를 가려내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친일이냐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었고, 일본 통치 시대를 살아온 사람 모두가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협력자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박완서 작가의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그러한 고민의 흔적이 역력히 배어 있는 작품이다. 이 책에 의하면 박완서는 1930년대 후반, 서울 매동국민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에서 한글은 가르치지도 않고 한마디도 못쓰게 했다. 일제 치하에서 교육이란 일본말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 즉 일본인화와 동의어였다.
일제 치하에서 좋은 학교 입학은 좋은 직장 취업의 지름길이었다. 당시 좋은 직장이란 총독부나 통치기관의 관료, 일본 기업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총독부 취업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박완서 작가는 아침 조회 때마다 황국신민의 맹세를 낭독했고, 때마다 신궁에서 신사참배를 했다.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승장구하자 조선의 유명 소프라노 가수는 "깨어졌다 싱가포르, 물러서라 영국아"라는 노래를 유행시켰고, 남양군도 함락을 자축하기 위해 조선인들은 자랑스럽게 밤에 등불을 들고 행진했다.
박완서의 4·5학년 시절 한 반에 창씨를 하지 않은 아이는 서너 명밖에 없었다. 박완서 작가도 창씨개명을 원했으나 할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완서의 고향인 경기도 개풍 박적골에서 박 씨 집안만 빼고 나머지 성씨 사람들 모두 창씨개명을 했다.
◆'친일파 타도' 깃발 든 소련 군정
박완서의 큰 숙부는 일제 치하에서 면서기로 취직하여 면의 총무부장, 노무부장을 지냈다. 해방이 되자 박완서 씨 일가는 큰 숙부 덕에 친일파 집안으로 낙인 찍혔다. 마을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난입하여 세간과 문짝을 때려 부쉈는데, 박완서는 창씨개명 하지 않은 집안을 도쿠야마, 아라이, 기무라로 창씨 개명한 청년들이 공격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사정이 이쯤 되다 보니 누구도 '친일파 타도' 깃발을 들고 나서기 민망한 상황에서 칼을 빼든 것은 소련 군정이었다. 1945년 9월 10일 평양주둔 소련 군정사령부는 각 지역 위수사령부에 '독립 조선의 인민정부 수립요강'을 지령했다. 이것은 북한에 소련식 공산국가(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민주국가)를 건설하고자 일본 군국주의 세력을 축출하고 친일 인물을 철저히 소탕하며, 일제에 희생적으로 투쟁해 온 혁명세력과 노동자·농민을 정치 일선에 내세우기 위해서였다(김국후, 『비록(秘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11, 137쪽). 요약하면 공산정권 창출에 반대하는 사람을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낙인찍어 공격하라는 지령이었다.
이 내용을 지령받아 38선 이남 지역에서 실천에 옮긴 것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이었다. 1945년 10월 16일 환국한 이승만의 정치적 목표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로 표출된 '대동단결, 자주독립'이었다. 박헌영은 10월 30일 "조선에는 일제의 잔재세력이 남아 있다. 친일파를 근절시킨 다음 옥석을 완전하게 가려놓고 순전한 애국자, 진보적 민주주의 요소만을 한데 뭉쳐 통일해야 한다"라고 이승만의 대동단결 노선을 발길로 걷어찼다.
박헌영이 자신을 공격하자 이승만은 11월 7일 공산당이 자기에게 부여한 인공의 주석직을 사퇴한다고 선언했다. 이때부터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은 집요하게 이승만을 친일 프레임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북한과, 그들을 추종하는 남한 내 좌익세력은 해방 후 친일파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회복한 것은 북한이며, 남한은 친일파 청산을 못 했기 때문에 민족사 정통성이 북한과 좌익에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이런 주장이 어느 정도나 역사적 사실과 합치되는지 추적해 본다.
◆북한의 친일 청산은 재산을 빼앗는 과정의 인민재판
1947년 10월 21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도쿄발 AP통신 기사에 의하면 해방 후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은 당시까지 150 만에 달했다. 이들은 북한의 토지개혁 및 공산정권 수립 과정에서 '친일파 민족 반역자'로 낙인 찍혀 인종청소 당한 사람들이다. 반면, 남한에서 북한으로 이동한 조선인은 그 1%(즉 1만 5천명)에 불과했다.
북한이 특정인을 친일파 민족 반역자로 처벌은 죄를 규정하는 법령도 없고, 죄를 판정할 만한 자격과 능력을 갖춘 재판관도 없이 군중심리에 의해 즉석에서 판결이 이루어졌다. 이러다 보니 친일파 청산에 관한 어떠한 근거나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의 친일 청산은 공산체제 성립을 위해 반공·민족주의 세력을 탄압하고 재산가로부터 재산을 빼앗는 과정에서 갖다 붙인 친일, 민족반역자라는 주홍글씨와, 이들을 축출하기 위한 인민재판이 있었을 뿐이다.
북한과 좌익들이 주장하는 북한의 '친일 청산'이란 공산정권 창출에 저항한 사람에게 '친일' 딱지를 붙여 숙청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친일 청산이 철저했던 것이 아니라 민족지도자에 대한 숙청이 철저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다(류석춘·김광동, 「북한 친일청산론의 허구와 진실」, 『시대정신』, 통권 58(2013년 봄 호), 244~252쪽 참조).
북한은 친일파 처벌을 공산혁명 투쟁의 도구로 삼았기 때문에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친일파라도 공산화에 동조하면 묻거나 따지지 않고 요직에 등용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강점기에 도의원을 지낸 강양욱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에 올랐고,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는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 통역, 만주에서 검사장을 했던 한낙규는 북한 검찰총장, 일본 제국군대의 파일럿 출신인 이활은 인민군 공군사령관에 올랐다(류석춘·김광동, 앞의 논문).
반면에 남한은 5·10 제헌의원 선거법 제정 과정에서 친일 부역자의 피선거권과 선거권을 박탈하는 조항을 삽입했다. 대한민국은 친일파 배제원칙을 준수하며 건국되었기에 정부 초대 내각이나 제헌의회 간부에 친일파가 참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북한보다 친일청산에 적극적이고, 철저했으며, 합리적이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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