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애 화가
정말 잘 그렸다. 그런 말을 듣고 어떤 그림인가 해서 보면 대체로 사실적인 그림이다. 보통 사람들이 그림에 보내는 최고의 찬사가 사진 같다는 말이다. 즉, 사람들이 잘 그린 그림이라고 했을 때 형태의 닮음이 중요하다. 재현이라는 미술의 역할에서 벗어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일반 사람들의 평가 기준은 엄연히 존재한다. 이러한 인식이 어떻다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성, 이것은 색의 문제보다 형태의 문제가 더 크다. 색 다음은 형태 이야기다.
색은 타고난 감각(sense)에 영향을 받는다. 말하자면 연습을 통해 어느 정도 색 감각을 기를 수는 있지만 선천적인 색 감각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형태는 조금 다른 문제이다. 형태는 인간의 지각 발달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형태심리학에 기초하는 아른하임(R. Arnheim)의 시지각 이론에 따르면 본다는 것은 사고의 작용으로, 인간이 성장함에 따라 분화되고 더 복잡화된다. 아이들의 그림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아이들은 나무를 둥근 나뭇잎 덩어리와 나무 둥치로 보고 또 그렇게 개략적으로 그린다. 그러다가 점점 더 부분과 전체의 상호 관계를 잘 보게 되고, 더욱 복잡한 구조를 파악하게 된다. 그렇게 볼 수 있게 된 결과가 그림에도 나타난다.
이처럼 보는 일, 사고, 미술표현은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래서 지각 발달은 미술표현을 통해 증진될 수 있다. 관찰(훈련)을 통해 지각의 분화를 촉진할 수 있다. 화가들은 형태를 파악하여 그리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꾸준히 훈련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데생이다. 여기에서 굳이 내가 '훈련'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데생을 공부할 때 단순하면서 반복적인 고단한 기초 학습 단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수천, 수만 번 팔이 아프도록 선을 긋는 경험을 통해 비로소 형태를 바르게 지각하고 그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데생 공부에 대한 잦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사고와 상관없는 기계적인 신체활동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데생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하나 있다. 나보다 3살 많은 둘째 오빠가 고등학생 때 그린 아그리파 데생이다. 지금도 생각이 날 때마다 마음이 밝아지는 그 그림은 어딘가 모르게 볼이 퉁퉁 부어 있었다. 오빠가 그린 석고상은 각상이었다. 각상은 빛의 방향에 따라 점진적으로 명암의 변화를 줘 그려야 한다. 예컨대 각을 기준으로 빛의 방향에 따라 점점 진하게, 또는 점점 연하게 명암을 넣어야 한다.
요즘도 고등학교 미술 수업에서 데생을 공부할까. 아니다. 성실하게 빛의 변화를 관찰하고 열심히 선을 긋는 경험은 지금 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절대적인 수업 시간의 부족과 힘든 것을 꺼리는 풍조도 미술교육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또 사고력을 키우는 일과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데생은 학교 미술교육에서 점점 자리를 잃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보는 일은 사고의 작용이고 지각 발달을 촉진하는 방법으로 데생은 유용하다. 사고력을 기르려면 오히려 데생을 공부하는 게 좋지 않을까. 물론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데생 공부가 모든 학생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미술교육에서 데생이 아닌 것을 선택한 우리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는지는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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