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칼럼] 백범일지(白凡逸志)를 다시 읽다

입력 2023-04-09 22:17:42

이상헌

이상헌 뉴스국 부국장

백범 김구 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는 누구나 한 번쯤 읽어봤을 책이다. 특히 '나의 소원' 편이 널리 회자된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하나님이 물으신다면 서슴지 않고 '대한독립이오'라고 답하겠다"는 첫 문장은 우리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한다.

'일지'(逸志)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기록했다는 의미이다. 역시 스테디셀러(steady seller)인 충무공의 '난중일기'(亂中日記)와는 달리 매일매일의 기록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책에는 각 사건의 시기가 모순되거나 인명·지명에서 착오가 적지 않다.

학계의 논란도 있다. 1896년 황해도 치하포 주막에서 선생이 명성황후 시해에 복수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인 쓰치다(土田)를 살해한 '치하포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의 정체가 백범일지에 나오는 것처럼 일본군이라는 설과 평범한 상인이었다는 설이 맞선다.

백범일지를 길게 이야기한 건 선생이 쓰치다를 해치우기 전 떠올렸다는 선시(禪詩) 때문이다. '가지 잡고 나무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서 잡은 손을 놓는다면 가히 대장부로다'(得樹攀枝未足奇 懸崖撒手丈夫兒·득수반지미족기 현애철수장부아)라는 내용이다.

지금 나라 안팎 상황은 스물한 살 선생이 맞닥뜨렸던 그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이다.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뜻을 모아야 할 때다. 끝 모를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 북한의 핵 위협에다 인구 소멸 위기 등등 눈앞이 캄캄하다.

죽을 작정을 해도 모면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난국을 대하는 정치권 행태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타인의 안위를 위해 벼랑에서 스스로 손 놓을 용기는 기대하지도 않지만 숫제 같이 죽자고 덤벼드는 꼬락서니다. 희망은커녕 고통만 안겨주는 부라퀴들이다.

전임 정권의 포퓰리즘 정책을 비판하던 정부는 정작 에너지 요금 2분기 인상은 미루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더 이상의 지지율 하락은 막아야 한다는 공포 탓일 것이다. 여당 지도부의 망언 퍼레이드는 마치 욕하는 재미에 보는 막장 드라마 같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대선 공약이던 '기본금융'을 다시 꺼냈다. 모든 성인에게 최대 1천만 원 한도의 대출을 제공하고, 정부가 전액 보증한다는 내용이다. 1천조 원을 넘어선 국가채무가 올해도 60조 원 넘게 증가할 전망이라는데 가당하기나 한 소리인가!

'천원의 아침밥'은 표만 구걸하는 정치권의 민낯을 보여준다. 여야는 이 사업을 모든 대학으로 확대하기로 하는 등 생색내기에 열중하고 있다. 청년 일자리 확충에 나서는 게 더 시급한 일이 아닐까 싶다.

더욱 슬픈 것은 정치권의 편 가르기 술수에 어느덧 익숙해져 버린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대통령이 찾았다는 부산의 횟집 이름을 두고 일각에서 친일 의혹을 제기하고 이를 퍼나르는 모습에선 할 말을 잃게 된다.

김구 선생은 1947년 백범일지 출간사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무릇 한 민족이 국가를 세워 국민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되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사상과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한 채 추태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내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다. 독립 정부가 조직되면 정부의 마당을 쓸고,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기로 결심해 아호(雅號)를 '백정과 범부'로 고쳤다는 김구 선생은 작금의 풍경에 무슨 말을 하실까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