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때부터 전쟁을 평화로 바꾼 지혜로운 인류
2년 전 초여름에 찾은 순천왜성(倭城). 따가운 햇볕 속에서도 시원한 바닷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따금 마주치는 선남선녀의 해맑은 웃음에 자칫 임진왜란 격전지라는 역사가 묻히고 만다. 이마에 땀을 훔치며 정상 천수각 터에 오르니 광양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육지로는 호남 각지로 연결되고, 바다가 손에 잡히는 지리적 요충지 순천.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 하(下)에 나오는 천시지리인화(天時地利人和)에서 지리, 즉 땅의 이로움을 왜장 우키타 히데이에는 간파했던 것일까? 우키타가 1597년 정유재란 기간중 쌓은 순천왜성은 이순신의 최후 승전 노량해전과 맞물린다.
고니시 유키나카가 순천왜성에 주둔하다 1598년 11월 퇴각할 때 이순신은 광양만 노량 바다에서 고니시를 추격하며 큰 피해를 입혔다. 이순신의 순국으로 갈무리된 6년 임진왜란을 조선과 일본은 어떻게 평화로 바꿨을까? 인류사 전쟁과 평화의 역사를 들춰본다.
◆칼리아스 화약, 평화협정의 선물 파르테논 신전
그리스 수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로 가보자. 전 세계 관광객들이 찾는 파르테논 신전이 우뚝 솟아 맞아준다. 신전에서 굽어보면 멀리 햇빛에 반짝이는 쪽빛 에게해가 드넓게 펼쳐진다. '숫처녀 신전'이라는 뜻의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 시민들이 수호여신 아테나를 기려 건축했다.
하지만, 당시 지구촌 최대제국 페르시아가 눈엣가시 아테네를 굴복시키기 위해 쳐들어온 B.C480년 2차 페르시아 전쟁 때 불탔다. 스파르타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 결사대가 아테네 북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전원 숨지며 페르시아의 진격을 늦춘 틈을 타 아테네는 에게해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했다.
해군진용을 정비한 아테네가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고, 이듬해 B.C479년 아테네 북서쪽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대군을 물리쳤다. 페르시아가 맥없이 퇴각한 뒤, 30년 넘게 아테네와 페르시아는 지중해 각지에서 부딪쳤다.
그러다 B.C448년 아테네의 칼리아스가 이끄는 사절단이 페르시아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B.C 1세기 시칠리아에 살던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로스는 칼리아스의 이름을 따서 '칼리아스 화약'으로 불렀다고 적는다. 40년 넘게 지속된 전쟁을 종식시킨 이 협약으로 아테네는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고 이듬해 B.C447년 아테나 여신에게 감사의 표시로 파르테논 신전 재건에 나섰다. 9년만인 B.C438년 완공한 건물이 2천500여년 오롯이 남아 전 세계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후손들은 몰려드는 지구촌민들 덕에 맛난 수블라키와 기로스를 만들어 팔며 외화를 벌어들인다.
◆카데시 협약,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결혼동맹
무대를 그리스에서 에게해 건너 튀르키예로 옮겨보자. 아나톨리아 내륙 지방의 수도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200여km 가면 보아즈칼레 마을이다. 여기에 3500여년 전 인류 최초로 철기문화를 꽃피운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사가 자리한다. 지금도 거대한 성벽과 건물터가 남아 히타이트의 전설을 피워낸다.
이곳에서 1906년 작은 점토판이 발굴됐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중인 '카데시 협약' 점토판이다. 점토판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까? B.C1275년 즉위 5년째를 맞은 29살 혈기방장의 이집트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 무와틸리스 2세가 오늘날 시리아 땅 오론테스 강변의 운하도시 카데시에서 맞붙었다.
람세스 2세는 병사 2만 명과 전차 2000대를 4개 군단으로 나눠 지휘했고, 무와틸리스 2세는 병력 4만명에 전차 3000대를 이끌었다. 지루한 공방전 끝에 어정쩡한 휴전을 맺고, 이후 소모적인 출동을 지속했다. 이때 조카(무와틸리스 2세 아들)를 내쫓고 왕이 된 하투실리스 3세가 람세스 2세에게 평화를 제안했다. 람세스 2세가 호응하면서 B.C1259년 '카데시 협약'이이 체결됐다.
이집트 18왕조부터 따지면 80년 가까이 이어진 양국 갈등과 전쟁은 결혼동맹으로 갈무리됐다. B.C1246년 히타이트 공주 마트호르네페루레, 이어 B.C1239년 경 또 한 명의 히타이트 공주가 람세스 2세의 왕비가 됐다. 람세스 2세가 죽은 뒤, 아들 메르네프타(재위 B.C1212년-B.C 1202년) 파라오 재위 시, 극심한 가뭄으로 식량난에 시달리던 히타이트에 이집트가 곡물을 보냈다.
상호원조 조약이기도 했던 것이다. 튀르키예는 1970년 카데시 협약 복제품을 만들어 유엔(UN)에 기증했고, 이는 지금도 뉴욕 유엔 건물에서 지구촌 평화를 상징한다.
◆지구촌 최고(最古) 평화협정, B.C2250년 메소포타미아
카데시 협약이 지구촌 가장 오래된 평화조약일까? 파리 루브르로 가보자. 수메르를 물리치고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한 아카드 왕국의 나람신왕과 메소포타미아 동쪽 이란고원지대 엘람 왕국 히타왕이 B.C2250년 맺은 조약 점토판이 탐방객을 맞아준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평화조약이다.
프랑스 고고학팀이 엘람 왕국의 수도 이란 수사에서 출토했다. 인류는 단군할아버지 시절부터 이미 전쟁을 평화로 되돌리는 지혜를 보여줬다.
◆프랑스-독일, 1,2차 세계 대전 딛고 EU 이끌어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60여km 떨어진 곳에 '콩피에뉴 숲'이 자리한다. 숲속에 낡은 기차가 기념관으로 꾸며졌다. 여기에서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1차 세계대전 종전협정이 맺어졌다. 1914년 9월 1일 시작돼 4년을 끌며 무려 1000만 명이 숨지거나 다친 미증유의 대참사, 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지었다.
1차 세계대전 기간중 독일과 프랑스가 가장 치열하게 붙었던 전투는 1916년 2월-12월 사이 프랑스 로렌 지방 '베르덩 전투'다. 불과 10개월 사이 독일군 16만 3천명(부상포함 38만-40만명), 프랑스군 14만3천명(부상포함 33만-35만명)의 사망자를 냈다. 6.25 3년간 한국과 유엔군 18만명, 북한군 52만명, 중국군 90만명이 사망한 것에 비하면 프랑스와 독일 사이 참혹했던 베르덩 전투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전투현장이던 베르덩 교외 두오몽 보 지역에 마련된 1차 세계대전 희생자 묘지에서 1984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과 독일 콜 총리가 만났다. 역사적 화해를 일궈냈다. 두 지도자 공동명의 동판 글귀가 탐방객의 시선을 오래도록 붙잡는다. "Nous nous sommes reconcilies(우리는 화해했고), Nous nous sommes compris(우리는 이해했으며), Nous sommes devunus amis(우리는 친구가 됐다)"
◆기유약조, 조선과 일본의 임진왜란 평화협정
일본의 천년 수도 교토로 가보자.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풍국신사(豊國神社) 앞에 귀무덤(耳塚, 혹은 코무덤鼻塚)이 임진왜란의 비극을 웅변한다. 조선사람 귀나 코를 베, 소금에 절여 가져다 무덤을 만들었으니... 천인공노할 만행에 한민족 수난이 배어난다. 6년을 끌며 무궁화 강역을 초토화시킨 임진왜란을 조선은 어떻게 갈무리했을까? 일본의 거듭된 강화 요청에 전쟁 9년 뒤 1607년 선조 40년 정사 여우길을 포함해 504명의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갔다.
조선통신사는 도쿄의 도쿠가와 막부와 국교 정상화의 물꼬를 텄다. 1609년 광해군 1년 조선과 일본은 13개조항 기유약조(己酉約條), 일종의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로부터 27년 뒤 1636년 인조 14년 일본에 간 조선통신사는 여진족 청나라 견제를 공동모색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고려는 몽골과 연합해 일본을 침략했다. 조선과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공동 대응했다. 일제 강점기때 많은 애국지사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6.25 때 중국은 대한민국의 적군이었다.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는 국제관계는 동서고금에 변함 없다.
역사저널리스트
댓글 많은 뉴스
이낙연 "민주당, 아무리 봐도 비정상…당대표 바꿔도 여러번 바꿨을 것"
'국민 2만명 모금 제작' 박정희 동상…경북도청 천년숲광장서 제막
위증 인정되나 위증교사는 인정 안 된다?…법조계 "2심 판단 받아봐야"
박지원 "특검은 '최고 통치권자' 김건희 여사가 결심해야 결정"
일반의로 돌아오는 사직 전공의들…의료 정상화 신호 vs 기형적 구조 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