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의 근대사] 일진회

입력 2023-03-20 14:37:06 수정 2023-03-20 17:34:38

동학지도자는 왜 친일에 물들었나
3대 교주 손병희 1901년 일본행…동학의 실패 척화론에 있다 판단
상투 자르고 대개혁 '진보회' 설립…1904년엔 친일단체 일진회와 통합
처음에는 민권 애국론 강조했지만 이용구 회장 오르며 서서히 친일화

1908년 12월 이용구의 집에서 촬영한 일진회 원호 대원.
1908년 12월 이용구의 집에서 촬영한 일진회 원호 대원.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단체 중의 하나가 일진회다. 나라를 일본에 넘겨야 한다고 주장한 친일 매국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왜 매국에 앞장섰는지, 그들의 논리와 주장과 이념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진회의 뿌리를 추적해 보면 한국인들이 '동학혁명'으로 떠받드는 동학이 나타난다.

1894년 12월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은 궤멸적으로 패해 와해하였다. 한동안 숨어 지내던 동학 지도부는 1897년 2대 교주 최시형이 동학의 도통을 손병희에게 전수했다. 다음해 최시형이 체포 처형되었다. 3대 교주 손병희는 동생 손병흠, 동학의 2인자 이용구와 함께 서북 일대 개항장과 상업지역에서 무역 활동을 하며 비밀리에 교세 확장에 나섰다.

동학의 3대 교주이자 일진회 설립에 앞장선 손병희.
동학의 3대 교주이자 일진회 설립에 앞장선 손병희.

손병희는 관헌의 추적으로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1901년 일본으로 향했다. 이때 이용구가 손병희를 수행했다. 그들은 일본에서 신분을 감추고 일본 정계 실력자들과 접촉하여 정세 파악과 대한제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동학의 실패는 국제적 안목의 부재, 서구 문명에 대한 철저한 저항의 결과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동학 지도부는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소설가 이광수를 비롯한 64명의 조선 청년을 일본에 유학시키는 데 앞장섰다.

동학의 2인자로 출발, 일진회장을 맡아 일본과의 대등한 합방을 꿈꾸었던 이용구.
동학의 2인자로 출발, 일진회장을 맡아 일본과의 대등한 합방을 꿈꾸었던 이용구.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자 손병희와 이용구는 러시아의 침략 야욕으로부터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존하고자 일본과 손잡는다는 아시아 연대론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손병희와 이용구는 일본 정부에 전쟁기금으로 거금 1만 원(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0억 원 정도)을 쾌척했다.

손병희는 동학 지도자 40명을 도쿄로 불러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야 우리의 독립이 보존된다"라면서 물심양면으로 일본을 도울 것을 명했다. 교주의 연설을 듣고 귀국한 동학 지도자들은 이용구를 중심으로 1904년 4월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중립회(中立會)를 거쳐 진보회(進步會)로 이름을 바꾸었다.

진보회는 교주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하루아침에 수만 명 회원이 상투를 자르고, 백의(白衣)를 벗어 던지고 검정 옷을 입고 대규모 집회를 열어 개혁과 진보, 국정 쇄신을 외쳤다. 이후 동학은 진보회, 단발흑의(斷髮黑衣)로 상징되었다. 또 3,000명의 근로자와 50명의 정찰 인력을 동원하여 일본군 전시물자 수송을 담당했다. 또 진보회에 소속된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회원 26만 명이 군용철도인 경의선 부설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문명개화를 추구한 손병희·이용구

일본에 체류하다 귀국한 송병준은 조선 내에 친일 단체를 설립하라는 일본의 지령을 받고 1904년 8월, 구 독립협회 인사들을 규합하여 유신회(維新會)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유신회는 8월 22일 명칭을 일진회(一進會)로 바꾸고 일본군 지원 아래 활동했다. 일진회는 진보회가 자기들과 비슷한 성격임을 알고 진보회와 합병을 제의했다. 손병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04년 12월 일진회로 단체를 통합시켰다. 일진회에는 해산당한 독립협회가 참여하여 중앙조직을 담당했고, 동학 교단은 광범위한 지방조직을 동원하여 하부구조를 형성했다.

일진회는 문명론에 근거하여 민권 우선의 애국론을 강조했다. 또 정부의 악정에 저항하여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앞장섰다. 힘없는 백성들이 관리들에게 수탈당하면 해결사로 나서 민중의 편이 되었다. 1906년 통감부 설치 이후에는 상공업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각종 회사 설립에 앞장섰고, 농공은행 설립에도 일조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이 일진회를 지지했다. 주한일본공사관은 일진회의 목적이 선량하여 폭정에 고생하는 다수 양민의 동정을 일으켜 항산(恒山) 있는 농상민(農商民)의 다수가 회원이 되었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할 정도였다.

◆일진회가 친일로 기운 이유

하지만, 일진회는 서서히 친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용구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905년 11월,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했고,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일진회 회장에 올랐다. 이에 분격한 손병희가 1906년 9월 일진회 지회 해산을 명했다. 이용구는 이에 저항하여 동학교도들을 일진회 산하로 끌어들이려다 출교 처분을 당했다. 그는 시천교를 설립하고 교조에 올랐다.

이용구가 친일로 기운 이유는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다루이는 『대동합방론』에서 호전적인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남진하는 위기에 대응하려면 아시아의 황인종이 연대하여 대아시아 연방을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방론에 심취한 이용구는 1909년 12월 일진회 명의로 '합방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용구가 추구한 합방은 양국이 대등한 주권을 가진 상태로 합방하며, 양국 국민은 정치상·사회상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910년 8월 29일 현실화한 것은 일본에 의한 대한제국의 폐절 및 병합이었다.

이용구의 일진회 활동을 배후에서 지원한 일본 낭인 우치다 료헤이(왼쪽)와 다케다 한시(가운데). 오른쪽이 일진회장 이용구.
이용구의 일진회 활동을 배후에서 지원한 일본 낭인 우치다 료헤이(왼쪽)와 다케다 한시(가운데). 오른쪽이 일진회장 이용구.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 법이다. 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조선총독부는 일진회에 해산명령을 내렸다. 일본이 그동안의 약속과 다르게 '합방'이 아닌 '병합'을 하자 큰 충격을 받은 이용구는 신경쇠약과 폐병으로 쓰러졌고, 일본 정부가 내린 작위도 거부했다.

일본으로 도피한 이용구는 급격히 병세가 악화하였다. 1912년 5월 임종을 앞둔 이용구는 함께 합방 운동을 벌인 낭인 우치다 료헤이(内田良平)가 병문안을 오자 그의 손을 붙잡고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내가 혹시 일본에 속은 게 아닐까요?"라고 유언했다. 우치다는 "뒷날 반드시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화답했다(조갑제, 『조선총독부, 최후의 인터뷰』, 조갑제닷컴, 2010, 209쪽).

구한말 나라가 기울어갈 때 이 땅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홉스적 자연 상태였다. 이 무렵 대한제국 백성들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놓여 있었다. 무능 부패하여 백성 착취만 일삼는 대한제국 황제의 전제적 통치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비록 이민족이지만 근대화된 문명 통치를 받을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라면, 독자 여러분은 과연 어느 편을 택하는 것이 자기 삶에 더 유리했다고 보시는가?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