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냐 연회냐…그곳에선 무슨 일이?
'유상곡수연' 즐기던 곳 맞지만 인근서 제사용품 대거 발굴돼
6촌 촌장 대신 박·석·김 3성씨 왕…박혁거세는 어떻게 시조 됐을까
신라에 대한 오해였을까? 아니면 신라사 인식에 대한 오류였거나 신라말기에 대한 폄하일지도 모르겠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신라 제 55대 경애왕을 기술하면서 '은연중에 놀기 좋아하고 음탕하다'는 평가를 통해 경애왕을 신라멸망의 원흉격으로 적시했다.
◆포석정의 비극
경주 곳곳에 산재한 신라 유적지 중에서 '포석정'은 가장 주목받지 못하는 곳 중의 한 곳으로 꼽힌다. 통일신라대 짧은 태평성대로 꼽히는 헌강왕 때 조성된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왕의 연회 장소였다는 '포석정'은 22m에 이르는 '인공 물길'을 따라 물이 자연스럽게 흘렀다.
유상곡수연은 흐르는 물길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오는 동안 시(詩)를 지어 읊고, 시를 제대로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시는 유희였다. 현재 포석정에는 당시의 정자는 사라지고 물길만 덩그러니 남아있어 신라의 쇠망을 상징하는 듯해서 쓸쓸했다. 물길 모양이 전복과 같아서 '전복 포'(鮑)자를 차용한 포석정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경주의 '시그니처'는 누가 뭐라고 해도 대릉원을 중심으로 한 고분군과 불국사일 것이다.그리고 폐허처럼 변해버린 월성과 황룡사지를 통해 천년제국의 흔적을 되살리는 시간여행을 떠나곤 한다.
김부식은 신라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서 포석정을 신라쇠망의 상징으로 삼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년제국 신라의 숨통을 끊은 마지막 장면 중 압권은 견훤의 포석정 습격사건일 것이다. 천년의 영화를 누리던 신라가 어느 날 하루아침에 국력이 다하여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신라하대로 내려오면서 신하가 왕을 시해하는 비극적인 왕권쟁탈전이 잇따르는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고 사회적 혼란이 겹치면서 자멸의 길로 들어섰을 것이다.
헌강왕(36대)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37대 선덕왕부터 56대 마지막 경순왕에 이르기까지의 150년간 한순간도 왕권이 안정된 적이 없었다. 잠시 동안 태평성대를 맞이한 헌강왕대를 제외하고, 정강왕 진성여왕 효공왕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에 이르면서 신라는 최후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 사이 궁예와 견훤 등 지방호족들이 태봉과 후백제, 고려 등을 잇달아 건국하면서 후삼국시대를 열었고 신라는 마침내 이들에게도 조롱당하는 소국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9월에 견훤이 고울부(영천)에서 우리 군사를 침범하므로 왕이 구원을 태조에게 청하니 태조(왕건)는 부장으로 하여금 정병 1만병을 출동하여 가서 구원케 하였다.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오지 아니한 것을 기회로 11월에 갑자기 왕경에 쳐들어왔다.
(마침)왕이 비빈과 종척으로 더불어 포석정에 가서 잔치하며 즐겁게 놀던 때라 적병이 닥침을 알지 못하였다. 창졸히 어찌할 바를 몰라 왕은 비와 함께 후궁으로 달려 들어가고 종척 공경대부 시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적병에게 사로잡힌 자는 귀인 천인 할 것 없이 다 해한 포복하여 노복이 되기를 애걸하였으나 (해를)면치 못하였다.
견훤은 대궐에 들어가 거처하며 좌우로 하여금 왕을 찾아내게 하였다. 왕은 비첩 몇 사람과 함께 후궁에 숨어 있다가 군중(軍中)에 잡혀갔는데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진(自盡)하게 하고 왕비를 간음하고 부하로 하여금 그 비첩들을 난동케 하고 왕의 족제(김부)를 내세워 국사를 권지케 하니 이가 곧 경순왕이었다."
견훤의 대공세가 임박하자 신라 경애왕이 왕건에게 긴급하게 구원병을 요청한 절박한 상황에서 포석정에서 성대한 연회를 벌이다가 목숨과 나라를 잃었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신라가 망한 지 200여년이 지난 1145년에 완성된 삼국사기라고는 하나 신라 입장에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다.
그래서 포석정이 비록 유상곡수연을 즐기는 연회장이기는 하나, 화랑세기 필사본이 포석정을 '포석사'(鮑石祠)라고 기술한 것과 인근에서 제사용품이 대거 발굴됨에 따라 왕이 포석정에 행차한 것은 연회가 아니라 왕실 제사를 지내려다가 변고를 당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어쨌든 천년사직이 풍전등화 처지에 빠진 상황에서 왕이 연회를 하다가 변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신라의 쇠락을 기정사실화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 같다.
◆신라는 3성(박씨 석씨 김씨) 정권, 6촌은 왕이 되지 못했다.
눈여겨 볼 다른 대목은 신라 말까지 김씨가 독점하던 왕권이 신덕왕부터 경명왕, 경애왕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박씨로 왕권이 넘어간 사실이다.
신라 시조 왕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박씨 왕은 7명이었다. 4대 석탈해를 시작으로 석씨(昔)씨 왕도 7차례 배출됐고 미추왕부터 시작된 김씨 왕은 내물왕이후에는 김씨들이 독점하다시피했다. '성골과 진골' 논란도 다 김씨 왕조내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다가 신라 말 신덕왕이 즉위하면서 경애왕까지 3대에 걸쳐 박씨로 넘어갔다가 마지막 경순왕(김부)에게 넘어가면서 신라는 소멸했다.
'불국토'(佛國土)라고 불리는 경주의 남산자락은 신라의 탄생과 멸망 등 '흥망성쇠'를 함께 했다. 남산에 들어서는 초입에는 시조 박혁거세의 탄강(誕降)전설이 깃들어있는 나정(蘿井)이 있고 조금 더 남산으로 들어가다가 만나게 되는 포석정은 신라의 멸망을 상징하는 표지석 같은 곳이다.
그 사이에는 박혁거세 때 지어진 신라의 첫 궁궐터로 알려진 '창림사지'가 자리잡고 있다. 월성(月城)시대가 열리기 전 신라왕의 거처인 궁궐은 현재의 창림사지에 건립되었다. 그 궁궐이 사라진 터에 뒷날 창림사가 들어섰지만 그 절마저 없어지고 지금 그 자리에는 석탑 한 기만 덩그러니 남아 봄이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 방탕하고 무능하다(?)는 경애왕릉도 지척지간인 삼릉에 있다.
이른 새벽 오릉을 찾아 혁거세부터 남해 유리왕 등 신라 초기 4대왕과 알영왕비의 능을 돌아 신라의 명멸을 추억하면서 남산자락으로 난 길을 따라 나정과 창림사지 포석정과 삼릉, 경애왕릉까지 한나절 천천히 들러본다면 신라천년을 한나절 동안에 체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신라왕은 외부세력이 독차지했다.
신라는 사실 토착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6촌, 6부 사람이 아닌 외부로부터 들어 온 '도래인'(渡來人)혁거세와 탈해 그리고 김알지로 대표되는 외부세력이 번갈아 통치한 나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라는 박씨(朴氏)와 석씨(昔氏) 그리고 김씨(金氏) 등 3성씨가 주인인 나라였다. 3성씨가 지배계급을 차지하고 당초 신라가 있던 진한지역에 자리잡았던 토착세력인 6촌의 촌장과 촌민들은 6두품이하 중하층민을 구성한 것이다.
신라 건국 전 진한 땅에 자리잡은 6촌은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 등이다. 이 6촌 촌장들이 기원전 57년 알천 언덕(지금의 탈해왕릉 옆의 표암)에 모여 알에서 탄생한 난생신화의 박혁거세를 신라의 첫 왕으로 추대했다.
6촌은 각 촌마다 각각의 신화를 갖는 등 독자적인 성씨의 시조가 됐지만 도래인들에게 정치권력을 빼앗긴 후 다시는 왕권 근처에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도래인이든 토착민이든 이들이 지금 한반도의 '오리진'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6촌장을 시조로 한 이씨, 최씨 정씨 손씨 배씨 설씨 등의 6성이 우리나라의 절대다수 성씨가 되고 여기에 왕족이었던 박씨와 김씨, 석씨 등 9성이 이후 한반도의 지배적인 성씨를 구성하게 된다.
그 이후 수많은 파생 본을 가진 성씨가 등장했지만 지금 우리나라 성씨의 60%정도가 김씨 이씨 정씨 최씨 손씨 배씨라는 것은 신라 6촌이 우리나라의 오리진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해준다.
신화의 세계라지만 6촌의 부족국가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6촌 촌장들이 어느 날 외부에서 온 어린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본적으로 외부 유입세력의 일원인 박혁거세는 토착세력인 6촌을 압도하는 힘과 권능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력으로라도 6촌을 제압하지 않은 상황에서 6촌 촌장들이 왕으로 합의 추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박혁거세는 불과 13살의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박혁거세는 외부 도래인집단의 대표였을 것이다. 월성시대로 넘어가기 전 도래인집단은 남산 서쪽인 창림사지에 첫 궁궐을 지었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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