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돈 대구고법원장 퇴임 "부족한 역량 재판 큰 탈 없이 감당, 선후배·직원 덕분"

입력 2023-02-16 17:44:00 수정 2023-02-16 19:13:49

불합리한 관행·업무방식 적극 개선, 대구법원 이전 작업 10여년 간 이끌어 와
후배 법관들에겐 약자에 대한 배려, 무거운 책임 강조
“공적 영역과는 당분간 거리, 자유롭고 소소한 일상 기대돼” 

16일 퇴임하는 김찬돈 제45대 대구고등법원장은
16일 퇴임하는 김찬돈 제45대 대구고등법원장은 "지난 1990년 대구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33년 동안 수많은 재판을 맡으며, 헌법과 법률에 따라 당사자의 주장을 균형감 있게 판단하고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성의를 다했다"고 말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지난 15일 대구고등법원장실. 방 안에는 김찬돈 법원장이 직접 찍은 사진 작품들이 슬라이드쇼 형식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10여년 전부터 생긴 취미라고 했다. 사진을 응시하던 김 법원장이 저울을 써가며 원두를 정확히 계량, 커피를 내렸다.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취미, 무엇이든 분명하게 측정하는 버릇. 천생 판사 같은 모습이었다.

김찬돈 대구고등법원장은 16일 퇴임식을 갖고 33년 간 몸담았던 법원을 떠났다. 퇴임 하루 전 정든 법원을 떠나는 소회를 들어봤다.

김 법원장은 "부족한 역량에도 재판과 사법행정 업무를 큰 탈 없이 감당할 수 있었음에 선후배와 직원들의 도움이 컸다"며 감사를 먼저 표했다. 겸손에 가까운 말과는 달리 김 법원장은 불합리한 관행이나 비효율적인 업무방식은 누구보다 앞장서 개선해왔다.

초임시절부터 수기 판결문을 타자기로 옮겨쓰고 교열 작업을 하던 법원에 PC를 도입하는 일에 앞장섰고, 공판중심주의가 생소하던 시절임에도 불필요한 선입관을 갖지 않으려 공판기록과 수사기록을 분리하고 검사에게 증거목록을 제출하게 한 것이 대표적이다.

2001년 영덕지원장 시절에는 개명허가가 지금처럼 매끄럽지 않던 시기임에도 범죄, 탈세 등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원칙적으로 모두 허가한 것도 그의 성격을 보여준다. 전국 법원 최초로 사설보안시스템도 영덕에 도입, 2명이 서던 당직근무를 1명으로 줄였다. 김 법원장은 "직원들 당직 부담도 덜고, 당직비 지출이 절반으로 줄어 예산 절감 효과도 거뒀다"며 웃었다.

재판에 임할 때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늘 중심에 뒀다. 특히 형사재판에 대해서는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고자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일반 국민과 국가가 싸움한다고 생각해봐요. 형사 재판이 그렇지요. 저는 그래서 영장 기각도 많이 했어요" 김 법원장이 말했다.

16일 퇴임하는 김찬돈 제45대 대구고등법원장은 등산 마니아이자 사진작가다. 15일 대구법원 청사 내 도서실에서 김 법원장이 지난 2019년 4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33일간 걸으며 직접 촬영한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16일 퇴임하는 김찬돈 제45대 대구고등법원장은 등산 마니아이자 사진작가다. 15일 대구법원 청사 내 도서실에서 김 법원장이 지난 2019년 4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33일간 걸으며 직접 촬영한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정운철 기자 woon@imaeil.com

그의 재임 기간 성과로 뺴놓을 수 없는 것이 대구법원 연호동 이전 작업이다. 2010년 대구지법 수석부장판사 시절부터 이전부지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2019년부터는 신청사 건축위원장을 맡아 최근까지 이전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등 핵심 역할을 해왔다.

그가 꿈꾸는 법원 신청사는 국민이 중심이되는 법원이다. 김 법원장은 "법원 특유의 권위주의적 설계를 탈피한 건물구조, 대중교통 이용 편의성, 장애인 접근성에도 주안점을 둘 것"이라며 신축 대구법원에 대한 기대감을 표했다.

앞으로도 법원을 지켜나갈 후배 법관들에게는 "법관은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재판하고 균형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며 사건과 국민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강조했다.

김 법원장은 "초임 판사들에게 '당신이 맡은 사건에 대해서는 대법원장보다 당신의 권한이 크다', '법대 아래에서 여러분을 재판하는 국민을 무서워하면서 재판하라'고 얘기한다"고 했다.

법관생활만 33년, 공직을 떠남에 대한 섭섭함과 홀가분함이 교차하지만, 홀가분함이 조금은 더 크다고 했다.

김 법원장은 "사건에 대해 물어보거나 부탁을 해오는 사람들과는 이미 오래 전 연락이 끊겼다. 얘기해봐야 도움이 안되고 원칙대로 해왔으니… 판사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그만큼 앞으로는 무겁고 공적인 일보다는 소소하고 얽매임 없는 일상을 당분간 누리고 싶다는 바람도 밝혔다. 김 법원장은 "가벼운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찾고자 한다. 100% 단정할 순 없겠지만 공적인 곳보다는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거나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자유로움을 추구하고 싶다"고 했다.

김 법원장은 퇴임 후에는 과거 같은 재판부에 몸 담았던 동료들과 법률사무소를 내고 대표변호사로 합류할 예정이기도 하다. 새출발을 앞둔 김 법원장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