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낙동강 방어선 전투] 치열했던 마산 방어선 전투

입력 2022-12-30 18:28:42 수정 2022-12-30 18:31:11

北 불시 기습에…"무너지면 끝" 사투 벌인 미·국군
신출귀몰 北 인민군 6사단 진격, 마산에는 병력 1천명 밖에 없어
워커 장군 미25사단 급파 결정…45일간 고지 주인 19번 바뀌어

1950년 미25사단 부상병이 후송되기 전 응급 치료를 받고 있는 모습.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제공
1950년 미25사단 부상병이 후송되기 전 응급 치료를 받고 있는 모습.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제공

"그때 뚫렸으면 대한민국은 없었다."

1950년 7월 31일. 미군은 경남 진주를 점령한 북한 인민군 6사단이 마산 방향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습 공격이었다. 당시 마산을 방어하던 병력은 진주에서 후퇴한 미25사단 27연대와 김성은 해병대대·미육군대대·전투경찰 약 1천 명이 전부였고, 급파할 예비대마저 전무했다.

포항-왜관-마산을 잇는 240㎞ 낙동강 방어선이 한순간에 무너질 고비에 처했다. 마산과 임시수도 부산까지는 직선거리로 40~50㎞. 이곳에서 수세에 몰리면 부산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미군·국군이 사투를 펼쳐야 하는 상대는 신출귀몰한 전법을 구사하기로 유명한 인민군 6사단이었다. 1950년 8월 1일 인민군 6사단 7천여 명은 마산 접경까지 진격하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압박했다.

자칫 방어선이 뚫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결정적인 판단을 내렸다. 약 240㎞ 거리인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25사단을 마산으로 이동하기로 한 것이다.

미25사단은 8월 3일 야간에 기적적으로 집결을 완료했다. 북한군이 마산 인근에 진격한 지 단 이틀 만이었다.

1950년 8월 방어선에 배치된 미군전차.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제공
1950년 8월 방어선에 배치된 미군전차.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제공

고지 주인 19번 뒤바뀐 '서북산 전투'

마산방어선 전투는 지난 1950년 8월 3일부터 9월 16일까지 45일간 마산 진전면 일대에서 한미 동맹군과 북한군 간 벌어졌다. 이 기간 동안 적군은 4천여 명이 죽고 3천여 명이 포로가 됐다. 아군은 1천여 명이 전사하고 5천여 명이 부상을 입은 처절한 전투였다.

극적으로 전열을 가다듬은 만큼 전투도 격정적이었다. 미25사단과 6사단은 1950년 8월 3일부터 서북산에서 혈투를 벌였다. 서북산은 경남 함안군 여항면과 창원시 마산 합포구 진북면·진전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 오르면 함안군과 진동면·진북면, 진주가 한눈에 보여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서북산 고지의 주인은 19번이나 뒤바뀌었다. 적군과 아군이 목숨을 내놓고 뒤엉키는 사투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어졌다. 북한군은 서북산 고지를 장악하면서 기습하는 지연전을 펼쳤고 미군은 고지를 사수하면서 반격을 이어갔다.

이 시기 서북산은 미군의 함포사격과 공군기 네이팜탄으로 나무와 풀이 자라지 않는 민둥산이 됐다. 그래서 미군은 이 산을 '늙은 중머리 산'이나 '네이팜산 언덕'이라고 불렀다. 피가 강물을 이룰 정도로 접전이 벌어져 '피의 고지'라는 이름도 붙었고, 전투에 지친 미군이 산을 오를 때마다 '갓 뎀 잇(God damned it)'을 내뱉었다고 해서 '갓뎀산'이라고도 불렸다.

로버트 리 티몬스 미군 육군 대위. 국가보훈처 제공
로버트 리 티몬스 미군 육군 대위. 국가보훈처 제공

격렬했던 만큼 서북산 전투는 한미동맹의 상징으로도 남아 있다. 미25사단의 로버트 리 티몬스 대위는 서북산에서 중대원 100여 명과 고지를 지키던 중 북한군 기관총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비록 티몬스 대위는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아들과 손자가 그의 뜻을 이어받았다. 아들인 리처드 티몬스는 아버지를 이어 군인이 됐고 주한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티몬스 대위 손자도 미 육군 대위로 한국 근무를 자원해 1996년~1997년 판문점 인근 미 2사단 최전방 초소에서 근무했다. 티몬스 대위부터 3대에 걸쳐 굳건한 한미동맹을 보여준 것이다.

마산 진동리전투에서 승리한 해병대 부대원들의 모습.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제공
마산 진동리전투에서 승리한 해병대 부대원들의 모습.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제공

◆해병대 활약, '귀신 잡는 해병대'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에는 국군의 활약도 컸다. 김성은 대령의 해병대는 1950년 8월 2일부터 마산합포구 진전면 고사리 파출소에 지휘소를 설치해 다음 날 새벽 북한군 정찰대 1개를 섬멸했다. 적군 87명을 사살하고 전차 2대, 차륜 6대를 파괴했지만 아군은 부상 6명에 그쳤다. 한국 해병대의 첫 승리이자 진동·함안지역 방어전투의 첫 승리였다.

김성은 대령이 이끄는 해병대는 이후 1950년 8월 6일 제1차 진동리지구 전투에서도 북한군을 일망탕진하는 쾌거를 거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해병대는 미 25사단장 킨 소장으로부터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극찬을 받았고 전 대원이 1계급 특진했다. 이때 나온 '귀신 잡는 해병'은 이후로도 해병대를 상징하는 구호가 됐다.

제2차 진동리지구 전투에서도 해병대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성은 대령 부대는 1천여 명의 전투경찰과 함께 진동에서 적군 200명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후 진북면 지산리 1㎞ 서쪽 맞은편 2번 국도와 접한 야반산의 140고지 옥녀봉을 점령하고 북쪽 취봉 여항산으로 진격했다. 국군은 진북면 신촌리 뒷산으로도 진격해 북한군 60명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야반산을 장악했다.

학도병의 피땀 어린 희생도 있었다. 당시 참전한 학도병 중 유일한 생존자인 류승석(91) 씨는 마산 합포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만 18세에 6·25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북한군으로 위장해 마산 진동·함안지역에 주둔한 적군 부대에 침투해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맡았다. 류 씨는 살아 돌아왔지만 군번 없이 전장에 몸을 던진 그의 동료 15명 중 8명은 실종됐다.

◆인천상륙작전의 교두보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은 언제든 전세가 역전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국군·미군과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 곳곳에서 혈투를 벌였고, 이중 한 곳이라도 뚫리면 당장이라도 한반도가 함락될 수 있었다.

마산방어선 전투는 6·25 전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벌어진 전투였다. 인민군 6사단의 사단장 방호산은 "마산을 점령하면 적의 숨통을 끊는 것"이라고 호언했을 정도로 마산을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다.

절체절명의 상황에도 한미 동맹군은 전투 내내 공세적인 방어로 북한군에게 피해를 입히며 부산으로 향하는 관문인 마산을 지켜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국군과 UN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고, 한계에 다다른 북한군은 수세로 전환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를 역전하는 기회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마산방어선 전투는 다른 6·25 전투에 비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억할 전쟁기념관이 없을 뿐더러 육군사관학교에서 발간한 '6·25 전쟁 60대 전투'에서도 관련 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처럼 마산방어전투가 잘 알려지지 않은 데에는 역사적 사료가 부족한 데다 국군이 아닌 미군 주도한 전투이라는 이유가 꼽힌다.

최근에는 창원시와 시민사회단체 주도로 마산방어선 전투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창원시는 연구용역비 5천만원을 편성해 관련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고 마산방어선 전투 기념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상임대표는 "마산방어전투 당시 서북산 고지는 주인이 19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했다. 서북산 능선이 뚫렸다면 마산이 무너졌고 임시수도 부산이 함락돼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없었을 것"이라며 "6·25 전쟁이 70년이 지났지만, 이 전투를 아무도 모르고 정부에도 기록이 없다. 이 역사적인 전투를 기념하고 미래 세대가 안보를 배울 수 있는 장소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