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치는 말로 한다. 수준이 높을수록 말이 중요하다. 독재같이 수준 낮은 정치는 힘으로 한다. 민주주의는 말로 한다. 영국 의회인 parliament는 '말하다'는 뜻의 프랑스어 parler에서 왔다. 영국인은 민주주의의 중추 기관인 의회를 '모여서 말하는 곳'으로 본 것이다. 민주주의의 핵심 정신은 소통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적적으로 민주주의가 꽃피었다. 그리스인에게 대화는 생명의 호흡이었다. 온난한 기후 덕분에 그들은 여가 시간을 야외에서 보냈다. 연극, 시 낭송 등이 야외 집회에서 이루어졌다. 정치 집회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 대화하는 문화에서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자란 것이다. 펠레폰네소스전쟁 때의 가혹한 환경에서도 아테네의 민회는 계속되었다. 그 이유는 공공사에 관한 대화가 공기처럼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말과 정치의 관계에서, 고려 31대 왕인 공민왕은 흥미로운 사례다. 그는 1351년, 22세 때 즉위했다. 당시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는 왕조 말기의 폐단이 첩첩이 쌓여 있었다. 공민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백성을 사랑했다. 그가 즉위하자 백성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큰 희망을 품었다. 과연 그는 즉위 교서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천명했다. 특히 그는 왕의 측근들이 말길을 막아 정치를 그르쳤다는 점에 주목했다. 요즘 용어로 문고리 권력의 폐단이다.
폐쇄적인 왕정에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민주주의처럼 자유 언론도 없기 때문에 교정할 방법도 없었다.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진나라 2세 황제 때의 환관 조고(趙高)다. 그는 황제에게 올라가는 말길을 모두 막고, 권력을 장악했다. 나중에는 사슴을 말이라고 주장했다(지록위마·指鹿爲馬). 언로가 막히면 이런 기막힌 일도 생긴다. 그쯤이면 정치는 절로 망한다. 진나라는 천하 통일 16년 만에 망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도 이런 문제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자식이나 친인척의 비위에 관한 보고에 역정 내지 않은 대통령은 없었다. 그게 곪아서 나중에는 큰 정치적 문제로 비화했다. 권위적인 대통령만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 앞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참모나 각료는 드물다. 대부분은 땀을 흘리고, 말을 제대로 못 한다.
공민왕은 처음부터 언로를 활짝 열어 모든 신하의 말을 경청했다. 관련 기관과 실무자들의 말도 직접 챙겨 들었다. 그 결과 여러 개혁 정책이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즉위 5년째인 1356년에는 반원 정책을 전격 단행해 100년여 만에 원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국정에 두루 통달한 뒤 문제가 생겼다. 공민왕은 신하들의 식견이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다. 점점 경청하는 자세가 사라졌다. 사랑하는 노국공주가 죽은 뒤 구중궁궐에 묻혀 지내다 암살당했다. 뛰어난 자질을 갖췄지만, 공민왕은 끝내 고려왕조를 살리지 못했다. 말길이 막히자 귀가 닫히고, 정치는 난조를 거듭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래 언론인 출신이었다. 그가 1898년 창간한 매일신문은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이다. 그는 언론의 자유에 관대했다. 국회에도 자주 참석해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국회와 대립이 커지자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담화 정치로 돌아섰다. 1958년에는 국가보안법에 '인심혹란죄'를 넣어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언로에 관한 한 파격적인 케이스다. 도어스테핑은 무모하기조차 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언론이 매일 최고 정치지도자의 말을 듣고 물을 기회는 없다. 만약 성공했다면, 한국 정치의 혁명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보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현실적으로 대통령과 언론의 대립은 운명적이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게 언론의 소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 헌정이라는 큰 틀 안에서 양자는 공존하고 있다. 말길이 닫히면 대통령과 언론은 물론이고, 국민이 불행하고, 심하면 나라를 해친다. 바로 우리 현대사에서 반복된 일이다. 신년 기자회견에서 언론과 가슴을 활짝 열고 소통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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