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길을 묻다] "시골노인이라 부르게" 유학자 동천 김창회

입력 2023-01-02 0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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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칭 ‘영남의 마지막 선비’, 자칭 ‘시골노인’이라는 유학자
겸양의 미덕 갖추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게 선비정신
이태원 참사 갈등,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해서는 안 돼
흔들리는 사회 기강… 교육 과정에 ‘마음 수양’ 포함해야

유학자 동천 김창회 선생이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 유자정(孺子亭)에서 선비정신과 도덕, 시대의 조류에 대해 본지 김태진 논설위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유학자 동천 김창회 선생이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 유자정(孺子亭)에서 선비정신과 도덕, 시대의 조류에 대해 본지 김태진 논설위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수차례 돌아온 고사(固辭)였다. 몸에 밴 겸양으로 읽혔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조선 선비의 재림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말을 아꼈다. 제아무리 고언(苦言)이라도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걸 실천하려 했다.

전 의성향교 전교인 동천 김창회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그를 청빈검약과 외유내강·솔선수범을 실천하는 스승이라고 했다. '영남의 마지막 선비'라 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정작 자신은 '선비'라는 칭호에 겸연쩍어하며 손사래쳤다. 그저 전통 학풍을 지키려는 시골노인이라는 것이었다.

"선비가 선비다워야 선비지, 돌팔이 같은 게 무슨 선비야. 그런 말 쓰면 큰일 난다"라고 정색을 했다. 그의 강한 부정과 달리 살아온 이력은 현대판 선비였다. 평생 국사와 향토사, 그리고 한학을 공부했고 마음을 수양했다. 안동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서 교원 등을 상대로 14년간 강의를 맡아온 터이기도 했다. 서애 류성룡의 외가인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 안동 김씨 도평의공파 집성촌에서도 유학자로 그를 우선에 꼽을 정도였다. 2013년 투명한 정치 구현의 선도적 역할을 기원하는 내용의 경북도청 신청사 상량문을 지은 이도 그였다.

과거에 합격하고도 낙향해 동량을 기르는 데 힘썼던 선비들의 모습, 그의 7대조인 천사 김종덕이 겹쳐 보였다. 조선 영·정조 시기 선비인 김종덕 역시 임금이 벼슬길로 불러도 겸손히 물리던 퇴계 이황의 학풍을 이어 영남에서 내로라하는 선비들을 길러냈던 어른이다. 폭설로 천지가 표백된 듯했던 2022년의 끝자락에 동천 김창회를 만나러 경북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사촌마을 유자정(孺子亭)으로 향했다.

유학자 동천 김창회 선생이 선비정신과 도덕, 시대의 조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유학자 동천 김창회 선생이 선비정신과 도덕, 시대의 조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1 〈선비정신〉

▶다들 '어르신'으로 부른다. '어른'을 어떻게 풀이하면 좋겠나.

=갈 자리인지 안 갈 자리인지 가릴 줄 알고, 해도 될 말인지 못할 말인지 가릴 줄 아는 됨됨이를 갖춘 이가 별로 없다. 옛날에는 어른 같은 아이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이 같은 어른이 적잖다. 행동과 말이 가볍지 않아야 한다. 폐일언하고 어른은 어른다워야 어른이지, 나이를 먹었다고 어른이 아니다.

▶유학의 '선비정신'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나.

=겸양의 미덕이다. 요즘은 겸양이 없다. 자기 목소리를 높이기에 바쁘다. 공자께서는 논어에서 '고불고 고재고재(觚不觚 觚哉觚哉)'라 하셨다. 모난 술잔이 모난 본연의 역할을 못하면 그걸 모난 술잔이라 할 수 있겠나. 제 역할을 등한시한 채 자리를 탐하기 바쁘면 나라든 조직이든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요즘 시대에 대한 직언으로 들린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못하고 신하가, 아비가, 아들이 제각기 역할을 해내지 못하면 창고에 곡식이 가득 있다 한들 어찌 제대로 산다고 하겠나.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 기본이다.

▶지금도 선비정신이 통할 수 있을까.

='의리'를 지킨다는 게 유학의 원뜻이다. 충효만 강조하는 게 아니다. 의리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다. 분수를 넘어서는 짓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선비들로 가득했던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망국 직전까지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까지 맞았다.

=임금의 무능 등 일부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유학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본다. 광해군의 '살제폐모(殺弟廢母)'는 인륜을 거스른 것이었다. 인륜을 거스른다는 건 도덕이 무너졌다는 의미다. 공교롭게도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임금이 된 인조가 광해군의 것이라면 뭐든 극단적으로 반대로 간 게 패착이었다고 봐야 한다.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였다. 바로 세우겠다는 의지는 좋지만 전임자에게 잘못이 있다 해서 후임자가 무조건 반대의 방향으로 치달으면 그 역시 위험하다.

▶일부에서는 1592년에 망했어야 할 나라를 백성들이 살린 것이라 평하기도 한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국민들이 먼저 움직인다. 코로나 사태가 터졌을 때 국민들이 일찍부터 마스크를 쓰고 방역에 나섰다. 스스로 조심했다. 그걸 우리가 다들 봤다. 일본이 두 번 우리 국토를 유린했다. 그때마다 의병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의병 활동을 독립운동이라 부른다. 불의에 항거해 자발적으로 나선 게 선비정신이고 의병정신이다. 이씨 조선을 지탱하려 했던 것보다는 꺼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것이었다.

유학자 동천 김창회 선생이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 유자정(孺子亭)에서 선비정신과 도덕, 시대의 조류에 대해 본지 김태진 논설위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유학자 동천 김창회 선생이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 유자정(孺子亭)에서 선비정신과 도덕, 시대의 조류에 대해 본지 김태진 논설위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2 〈선비정신과 도덕〉

▶선비정신으로 바라본 현실 정치는 어떤가.

=당리당략보다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일할 사람이 정부에 들어가야 나라가 바로 선다. 말로만 국민을 내세우는 무리들은 안 된다. 높은 벼슬을 하진 못했어도 '조선조 오현(五賢)'으로 불린 위대한 학자들 중에서 조광조를 제외한 네 명은 영남인이다. 그들은 학문과 정신 수양에 힘썼다. 벼슬을 탐하지 않는 선비정신이 기저에 있었다. 인기에 영합해 지키지도 못할 말을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건 정상배(政商輩)나 하는 짓이다.

▶선비정신을 사회 유지 이념으로 삼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도덕이고 윤리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도덕의 기준은 변하지 않는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세상 변한다고 변하던가. 도덕이 허물어지면 나라가 허물어진다. 지금은 도덕불감증 시대인 듯하다. 사회 기강이 약해지면 뿌리가 흔들리기 마련이다.

▶지금, 도덕은 살아있나.

=허물어져 간다. 아직 기회는 있다. 국가 시스템, 분위기 전환이 있어야 하는데 교육 과정을 바꾸는 게 수반돼야 한다. 사회를 근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시스템은 단번에 이뤄지기 어렵다. 장기적으로 교육 과정에 '마음 수양'을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개조에 가까운 교육 정책 변화 촉구의 주문으로 들린다.

=그렇다. 교육 정책이 영어, 수학 중심이어서는 곤란하다. 문학·사학·철학, 윤리와 도덕, 한문 등은 글공부가 아니라 마음공부요, 수양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이런 과목들을 선택으로 맡겨두니 더 안 보게 된다. 학생들이 종합적으로 사고하고, 심도 있는 고민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수학과 과학에 재능이 있는 학생들이 의예과 진학을 선호하고 경제적 이윤이 높은 진료과목으로 쏠리는 것은 정상적으로 보기 어렵다. 사람의 기본이 되는 학문들을 경시하면 결국 국가적 손실로 돌아온다.

▶선비는 만들어지는 것인가

=책만 파먹으며 공자왈, 맹자왈 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자세다. 세상은 모든 사람의 학교다. 역사는 모든 이의 교과서이고, 경험은 모든 이의 스승이다. 어디라도 배울 게 있다.

유학자 동천 김창회 선생이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 유자정(孺子亭)에서 선비정신과 도덕, 시대의 조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유학자 동천 김창회 선생이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 유자정(孺子亭)에서 선비정신과 도덕, 시대의 조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3 〈우리 시대의 과제〉

▶이태원 참사 이후 사회적 갈등과 대척점을 향해 가는 정치적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선비정신'이 어찌 용해돼야 한다고 보는가

=순리대로 해야 된다. 앞서가던 수레가 넘어지면 뒤따라오던 수레는 조심하게 돼 있다. 전철을 밟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태원 참사는 일어나서는 안 될 안타까운 사고였다. 그렇지만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편리한 대로 받아들이고는 약삭빠르게, 경박하게 이야기하면서 이걸 직언이라 포장하는데 그건 독설이다. 사건을 보는 시각차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근본적으로 도덕과 윤리라는 게 있다.

▶'감수성', '공감 능력' 등을 요구하는 시대다. 인륜적 도리와 통하는가.

=말 자체가 나쁘다 보기 어렵다. 다만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에 찬동하지 않는다고 능력 부족 운운해선 곤란하다. 공감 능력이란 정서가 통하는 이들끼리 교류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 아닌가. 억지를 부리는 수단으로 좋은 개념들이 마구잡이로 쓰여서는 안 될 것이다.

▶세대차를 줄이기 위한 시도도 과제로 부상했다. 통합의 시도를 해야 한다면 어떤 방식이어야 부작용을 줄일 수 있을까.

=세대차야 늘 있어 왔지만 요즘이 조금 더 강한 것 같다. 지금의 40대와 20대의 생각은 과거의 그 나이대의 생각과 많이 다르다. 아이를 안 낳고,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게 당연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전 세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확연한 차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옅은 이슬에 옷이 젖듯 스며드는 게 '정서'다. 모르는 사이에 배어드는 건데 밥상머리에 함께 앉을 기회가 없으니 윗대와 아랫대가 이야기를 나눌 겨를도 없다. 단박에 해결되기 어렵다.

▶2023년의 대한민국이 품어야 할 시대정신이 무엇이라 보나.

=혼돈의 시대, 불확실성의 시대다. 시골노인이 그런 걸 감지할 수 있겠나. 요즘 나오는 신조어도 잘 모르는데. 도덕의 회복을 우선순위에 둬야 하지 않겠나. 도덕은 변치 않는다고 본다.

▶'와해'(瓦海)라 불렸던 사촌마을을 1896년 일본군이 잿더미로 만들었다. 의병운동인 '병신창의'를 빌미로 멸문지화에 가까운 복수전에 나선 것이었는데 그때 종택인 '초려'(草廬)와 '유자정'(孺子亭)도 소실됐다가 2009년 유교 문화권 개발 사업으로 복원됐다. 한일관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말씀해 주시라.

=과거를 잊으라는 건 아니다. 기억은 하되 실리를 생각해야 한다. 가해자인 일본은 쉽게 잊는다. 피해자가 그러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정학적 위치에서 한미일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100년 전 원수임을 왜 모르겠나. 하지만 몇 년 전 있었던 일본 제품 불매운동 '노재팬'이나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 주장은 국익에 득이 되질 않는다.

▶임진왜란의 의병, 일제강점기의 독립군, 6·25 전쟁의 학도의용군 등 국난 극복의 선두에는 영남이 있었다. 이를 선비정신의 발로로 해석하면서 지형적 영향으로 분석하는 이도 있다.

=연관성이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대구의 팔공산, 봉화의 청량산, 구미 금오산 등 영산과 도저하게 흐르는 낙동강을 보면 스스로 겸손해지기 마련이다. 선비들도 그러했다. 신독(愼獨)의 자세, 자율적 경계로 볼 수 있다. 자신감과 자랑은 다르다. 함부로 말하지 않지만 대의명분이 서면 스스럼없이 나섰다.

▶재능기부로 지역민들에게 논어를 강의하시는 걸로 안다. 현재의 우리가 곱씹어 볼 경구를 전한다면.

=논어에서 공자께서는 "부자가 되고 싶다 해서 그렇게 된다면 남의 말채찍을 잡는 일이 있어도 하겠다만, 부(富)를 구해서 얻을 수 없다면 나는 마음의 바른 길을 가리라"고 했다. 곧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될 40, 50대들은 특히 "언행을 조심하고, 공부를 부지런히 하라"고 권하고 싶다.

※동천(東泉) 김창회는?

1935년생으로 의성도서관장, 의성향교 전교를 역임한 바 있다. 현재 격주로 발행되는 의성신문에서 주필을 맡고 있다. '동천산고', '동서명언선집', '대추꽃 예찬', '넓은 세상 좁은 마음', '빚지고 저승에 가기 싫다고 한 시골노인' 등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