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새책]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했냐

입력 2022-12-22 10:20:16 수정 2022-12-23 19:48:49

경향신문 젠더기획팀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유튜브
유튜브 '이런 경향' 채널의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했냐' 영상 캡처.

우리는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명함을 사용하곤 한다. 그 작은 종이 한 장에는 내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소속된 곳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가 담겨있다.

이 책은 평생 일했지만 자신을 나타낼 명함 한 장 없었던, 심지어 자신의 이름 대신 늘 누군가의 아내, 엄마로 불려온 6070 여성들의 얘기를 가감없이 전한다.

굴곡진 시대, 어쩌면 가장 아래에서 사회를 지탱한 것은 집안일부터 바깥일까지 평생을 일해온 이 '큰 언니'들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의 노동은 너무나 흔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왔고, 많은 사람이 그들이 하는 일의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책 속에는 지은이가 큰 언니들의 일하는 삶을 따라가며 길어낸 일의 가치,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책은 5개의 출근길로 구성돼 있다. 첫번째 출근길에서는 새벽 4시에 출근하며 한 자리에서 20년 넘게 국숫집을 운영한 1954년생 손정애 씨의 얘기를 듣는다. 파도처럼 몰아치는 나쁜 일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온 손 씨의 얘기가 펼쳐진다.

두번째 출근길에서는 결혼 후 집안일을 도맡아온 여성들의 얘기를 전한다. 전업주부, 집사람이라고 불리는 여성들이 해온 다양한 노동의 세계를 볼 수 있다. 세번째 출근길에서는 엄마와 딸이 서로의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연결되는지를 살펴본다. 남존여비 시대와 페미니즘 시대를 사는 여성들의 노동의 면면을 들여다본다.

네번째 출근길에서는 도시와는 또다른, 농촌 지역의 여성들이 가부장제 그늘 속에서 어떻게 삶을 개척해왔는지 따라가본다. 다섯번째 출근길에서는 꾸준한 자기계발과 '탈혼' 등으로 새로운 미래에 도전하는 큰 언니들의 얘기를 들어본다.

단순한 인터뷰집이라기엔 삶이 무척이나 생생하게 다가온다. 지은이는 수개월간 인물마다 5, 6번의 만남, 때로는 1박 2일로 이어진 인터뷰로 내용의 깊이를 더했다. 큰 언니들의 당당하고 멋진 모습을 담은 사진은 물론, 생생한 현장을 담은 영상 인터뷰도 QR코드로 수록됐다.

또한 출근길 챕터 끝마다 붙은 '인사이트' 코너에서는 데이터와 통계를 통해 이들의 노동이 저평가된 구조적 맥락을 짚고, 당시 한국의 현대사적 사건들도 함께 살펴본다. 1963년 경제기획원 한국통계연감부터 2021년 통계청 마이크로데이터까지 여성들의 삶을 보여주는 각종 데이터, 1953년 근로기준법 제정 이후 여성 일자리와 관련한 법적인 변화들도 조사해 보여준다.

책 말미, 주인공 중 한 명인 이선옥 씨는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과연 이것만일까 싶거든요. 명함에만 머무르게 될까봐요. 그러니까 저는 제가 명함이에요, 제 자신이"라고.

취재기자, 사진기자, 교열기자, 영상PD 등 다양한 직의 사람들이 모인 경향신문 젠더기획팀이 직접 수십 명의 여성을 만나 인터뷰하고 그들의 삶을 기록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 이달의 좋은 보도상, 한국기자협회 제378회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했다. 296쪽, 1만8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