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누구에겐가 말해 주긴 해야 하는데
마음 놓고 말해 줄 사람이 없어
산수유꽃 옆에 와 무심히 중얼거린 소리
노랗게 핀 산수유꽃이 외워두었다가
따사로운 햇빛한테 들려주고
시냇물 소리한테까지 들려주어
사랑한다, 나는 사랑을 가졌다.
차마 이름까진 말해줄 수 없어 이름만 빼고
알려준 나의 말
여름 한 철 시냇물이 줄창 외우며 흘러가더니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물고
다만 산수유꽃 진 자리 산수유 열매들만
내리는 눈발 속에 더욱 예쁘게 붉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산수유꽃 진 자리」이다. 담아 둘 수 없어 뱉어낸 '영원한 사랑'을 노란 산수유꽃이 세상 만물에게 봄소식을 전한다. 꽃이 지고 난 자리에 푸른 산수유 열매가 맺혀 봄의 열기 덕분에 무럭무럭 자라고 여름에 푸른 덩치를 키우고 가을 햇살에 빨갛게 익으면 어느덧 모든 것이 고요해지는 겨울이 된다. 만물의 중얼거림이나 고백이 담긴 산수유는 붉디붉다. 왜 산수유나무를 '입바른 소리'의 화신으로 봤을까?

◆신라 경문왕 당나귀 귀 설화
신라 제48대 경문왕이 즉위하자 갑자기 귀가 길어져 당나귀 귀처럼 됐다. 임금 주위에 아무도 몰랐으나 오직 머리에 쓰는 복두(幞頭)를 만드는 사람만이 비밀을 알고 있었다. 복두장이는 평생 비밀을 지키다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도림사(道林寺)의 대나무 숲속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이후 바람 불 때마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렸다. 왕은 대나무를 베어내고 대신 산수유나무를 심게 했다. 이번엔 바람이 불자 "임금님 귀는 길다"는 소리가 났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조에 나오는 경문대왕(景文大王)의 여이설화(驢耳說話), 즉 당나귀 귀 이야기다. 우리 문헌에 가장 오래된 산수유나무 기록이다. 경문왕은 자기 귀의 비밀을 감추려고 대나무를 베어 버리고 산수유를 심었지만 산수유 역시 진실을 감추지 않는 올곧은 나무였기에 바른 소리를 냈다.
'대쪽 같은' 성격인 대나무의 직설보다는 점잖은 소리로 말했을 뿐이다. 늦가을 잎이 모두 떨어진 산수유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길쭉한 타원형의 새빨간 열매에서 어쩌면 긴 귀를 연상해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경상도 경주부의 특산물 가운데 하나가 산수유로 나온다. 옛날 경문왕이 심었던 산수유가 대대로 이어 왔던 게 아닌가.

◆조선 선비 산수유꽃 즐겨
층층나무과의 낙엽활엽소교목인 산수유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 지역에 분포한다. 산수유꽃은 종다리처럼 봄의 노래를 조잘거리고 싶어 잎이 피기 전 3월쯤 꽃봉오리를 터뜨린다. 다른 꽃이 피기 전에 일찌감치 노란색으로 나무를 덮으며 벌들의 시선을 독차지한다.
산수유나무는 파스텔 톤의 은은한 꽃이 아름다워 관상용 정원수로 널리 심었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의 정원에서도 한두 그루 정도 볼 수 있다.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종택인 독락당 뜰이나 대구 동구 평광동 단양 우씨 재실에도 오래된 산수유나무가 있다.
조선시대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양화」(養花) 편에는 산수유에 대하여 '땅이 얼기 이전이나 해빙 이후에 모두 심을 수 있다. 2월에 꽃이 피고, 붉은 열매는 완상할 만하다'라고 나온다. 조선시대 산수유를 꽃나무로 중시여겼음을 보여준다.
굳센 절개가 백이처럼 고고하니
(勁節高孤似伯夷·경절고고사백이)
봄을 다투는 복사꽃 오얏꽃과 어찌 시기를 함께하겠는가
(爭春桃李肯同時·쟁춘도리긍동시)
산속 정원은 적막하여 오는 사람도 없는데
(山園寂寞無人到·산원적막무인도)
짙은 맑은 향기를 다만 스스로 아네
(藹藹淸香只自知·애애청향지자지) 〈『단곡집』(丹谷集)〉
임진왜란 때 영남에서 의병으로 활동했고,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던 선비 곽진(郭瑨)의 시 「수유화」(茱萸花)다. 봄에 피는 산수유를 백이(伯夷)의 청절에 비기고, 애완(愛玩)하는 마음을 읊었다.
산수유나무는 하나의 꽃봉오리에서 긴 꽃자루를 지닌 작은 꽃 20~30개가 몰려나와 우산형 꽃차례를 이룬다. 한 곳에 수많은 꽃송이들이 모여 있는 모양이 특이할 뿐만 아니라, 자세히 들여다보면 4장의 꽃잎을 지닌 작은 꽃 하나하나가 앙증맞다.

◆중양절 귀신 물리치는 상징
옛사람들은 산수유꽃을 봄의 전령으로 여겼고 가을에는 열매를 중양절에 벽사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지금은 사라진 절기인 음력 9월 9일 중양절은 중국에서 비롯된 풍속이다. 붉은 산수유는 악귀를 물리치고 국화주는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마셨다. 또 산수유를 주머니에 넣어서 허리에 차거나 산수유가 달린 나뭇가지를 머리에 꽂기도 했다. 그래서 중양절을 일명 '수유절'(茱萸節) 혹은 '수유회'(茱萸會)라고 불렀다.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인 서거정(徐居正)의 시문집 『사가시집』 제52권 시류(詩類) 「이날 손이 와서 간단하게 한 잔 마시고 취하여 읊다」라는 시에는 중양절 풍습을 엿볼 수 있다.
손이 와서 다시 술 마시고 즐겁게 놀고는
(客來聊復講歡娛·객래료부강황오)
곤드레 취해 기자에게 부축하게 하노니
(酩酊仍敎驥子扶·명정내교기자부)
서풍을 보내 내 모자 떨구게 하지 마라
(莫遣西風吹帽落·모견서풍취모락)
짧은 머리에 수유를 꽂은 게 부끄럽단다
(羞將短髮揷茱萸·수장단발삽수유)
조선시대 실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나오는 산수유에 얽힌 이야기 또한 재미있다.
당시(唐詩)에서 말하기를 "사악을 물리치는 수유 술"(辟惡茱萸酒)이라고 했고, 두보의 시에는 "다시 수유를 들고 자세하게 바라본다"(更把茶菓子細看)라고 했다. 상고하여 보니, 옛날 환경이 9월 9일에 비단 주머니를 만들어서 수유를 속에 채워 팔에 매달고 높은 곳에 올라 액을 피했다고 한다. 대체로 수유는 가을이 되면 열매가 붉게 익기 때문이다. 근래에 이홍헌(李弘憲)이 「중구절에 양궁을 추억하다」(重九憶兩宮)라는 시에서 "수유꽃이 지난해의 가지에서 피었네"(茱萸花發昔年枝)라고 했으니 이것이 망발(妄發)이다. 고관이 상등(上等)에다 두었다. 가소롭다.
이홍헌이 지은 시에서 '수유꽃이 지난해의 가지에서 피었네'라고 생뚱맞은 구절을 지었는데도 고시관(考試官)이 높은 점수를 주자 같잖고 우습다고 했다. 산수유는 9월에 피는 꽃이 아닌데 피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산수유 약재로
산수유나무 열매는 옛날부터 유명한 약재다. 늦가을에 빨갛게 익은 열매를 수확한다. 약간의 단맛과 함께 떫고 강한 신맛이 난다. 『동의보감』에는 "음을 왕성하게 하여 신정과 신기를 보하고 성기능을 높이며…. 정수를 보호해주고 허리와 무릎을 덥혀 주어 신을 돕는다"는 전형적인 정력 강장제로 나온다.
약재로 쓸 열매를 얻기 위해 산수유나무를 많이 재배하는 경북 의성군 사곡면 화전리는 해마다 3월 말에서 4월 초가 되면 온 마을이 노란 산수유꽃으로 뒤덮여 절경이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산자락에 이르기까지 두루 퍼져 있는 산수유나무는 3만여 그루나 된다.
가을에는 빨갛게 영근 산수유를 수없이 매단 산수유나무 또한 장관이다. 꽃과 열매로 두 번 보는 즐거움을 주고 농민들에게 소득도 안겨주는 고마운 나무다. 그런데 인건비가 오르고 경제성이 떨어지는 데다 올해는 봄 가뭄이 심해서 열매가 많이 달리지 않았다며 주민들은 아쉬워한다.
산수유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농가들은 열매를 팔아 자식들의 대학등록금을 마련했다고 해서 산수유나무를 '대학나무'라 부르기도 했다. 산수유 열매는 씨에 독이 있어서 예전에는 하나하나 이로 씨를 빼냈다. 평생을 산수유 씨를 제거하느라 이가 상한 할머니가 예전에는 많았다.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중략)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성탄제』, 삼애사, 1969〉

안동 출신 김종길 시인의 「성탄제」는 가난한 아버지가 앓고 있는 어린 아들에게 산수유밖에 줄 수 없었던,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엮어내 감동을 준다.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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