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
보수가 길을 잃었다. 이회창의 패배 후, 박근혜의 탄핵 이후와 비교해도 지금의 보수 위기는 정말 심각하다. 그땐 그래도 성찰이 있었다. 윤석열의 탄핵에 지금 보수는 어떤 반성을 하고 있는가?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저 그런 권력투쟁으로만 보인다. 국가를 이끌어갈 철학, 정책 비전, 도덕성과 실천력, 그리고 국민적 공감대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보수가 '또' 실패한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는 후보는 없다. 보수의 혁신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보수가 국민에게 어떻게 희망을 줄 것인가는 언급이 없다.
보수 혁신의 길을 생각하면 경세가(經世家) 박세일 교수가 떠오른다. 그는 2000년대 초, 보수 정당이 이념적 혼란에 빠졌을 때 '선진화'를 보수의 시대정신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보수가 가지고 있던 '냉전적 안보 보수', '기득권 중심의 보수' 이미지를 벗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대안은 보수가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사회적 연대와 책임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세일 교수의 보수 이념은 '공동체 자유주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자유를 기조로 하면서도 훨씬 더 포용적이며 도덕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인 보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을 만들어서, 그리고 국회의원이 된 후에 한나라당 선진한국 비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이런 생각을 정치에서 실천하려고 했다.
그 후, 박세일이 가지고 있던 '경세가적 문제의식'은 유승민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유승민은 박세일의 제자이기도 하며 자유과 공동체의 조화라는 공동체 자유주의 노선과 닿아 있다. 유승민은 박세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실 정치 속에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온몸을 던져 싸운 보수 개혁의 전사였다.
유승민은 시장의 효율성이 중요한데 그것만으로는 국민의 삶을 책임질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우리나라 보수 정당이 따뜻한 보수, 공정한 보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보수의 바른 길을 제시했다. 그는 따뜻한 보수가 되기 위한 조세, 교육 정책 그리고 정치개혁 등 개혁 노선을 천명했다. 특히 그가 주목을 받은 것은 박근혜 대통령 시기에 원내대표 자격으로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 정당 대표 연설이었다. 그의 명연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다'라는 말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것은 당시 보수 진영에서는 금기의 언어였는데 유승민이, 그것도 원내대표의 자리를 맡고 있는 보수 정당의 지도자로서 내뱉었으니 보수 진영 내부는 뒤집어질 듯 시끄러웠다. 진보 진영에서도 그 배경이 궁금하여 술렁거렸다.
유승민은 결국 보수 진영의 중심에서 배제되었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비주류로서 그의 정치적 여정은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타협하지 않고 초지일관 한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자기의 노선이 보수 정당 내부에서는 소수 의견으로 괄시를 받고 있으나 그는 여전히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는 국민에 대해 일관성, 진실성(integrity)을 보여온 정치인이었다. 그에게 씌워진 악의적 프레임은 보수 기득권 세력이 만든 보수 혁신에 대한 배제의 틀이라고 생각한다.
유승민이 가지고 있던 현실 정치의 꿈은 이번에도 꺾이고 말았다. 그는 일찌감치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했다. 유승민 개인의 거취 문제가 아니라 그가 표상하고 있던 보수 혁신의 비전이 보수 정당에서 설 자리가 없어진 것 같아서 솔직하게 애석하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자기의 '뜻'을 꺾은 것 같지는 않다. 자유와 공동체, 시장과 연대, 성장과 복지라는 상반된 가치를 조화시키지 못하면 보수는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고 한 경세가로서의 이상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여우나 가상하다.
박세일이 세운 보수의 철학도, 유승민이 보여준 보수의 비전도 다시 주목을 받을 날이 곧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보수 전체가 소수 극우에게 볼모가 되어있는 지금 보수의 참 길에 대해 누구도 말할 용기를 내지 않고 있는데, 이렇게 해서는 무너진 보수를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세일은 세상을 떠났고 유승민은 칩거하고 있지만 수요일 아침, 보수 개혁의 길을 제시한 두 경세가의 이름을 새삼 소환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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