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들려주는 클래식] <17> 광활한 대지 위로 퍼져가는 종소리

입력 2022-12-12 13:07:15

1923년 촬영한 돈 코사크 합창단 모습.
1923년 촬영한 돈 코사크 합창단 모습.
서영처 계명대 교수
서영처 계명대 교수

러시아 민요에는 종소리에 관한 것들이 많다. '저녁 종소리', '종소리는 단조롭게 울리고', '트로이카의 작은 종' 등 멀리 퍼져가는 종소리는 광활한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러시아 사람들의 정서를 잘 표현한다. 정교회 사원은 러시아 농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으로 제정 말에는 적군을 막는 요새 역할을 했고 소비에트 시절에도 인민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해왔다.

'저녁 종소리'는 고향을 떠난 사람이 고향에서의 삶을 회상하는 노래이다. '저녁 종! 저녁 종!/ 얼마나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지// 어린 시절 고향/ 내가 사랑하고, 아버지 집이 있던 곳/ 난 저녁 종과 영원히 이별했네.' 발랄라이카 합주단의 반주에 베이스 저음으로 듣는 '저녁 종소리'는 먼 이국땅의 사람에게도 아련하고 그윽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겨울에 들으면 마음을 더 시리게 하는 곡이 있다. '종소리는 단조롭게 울리고'의 화자는 세 마리의 말이 끄는 트로이카를 타고 마부의 노래를 들으며 회상에 잠긴다. 그는 먼 길을 떠나며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거친 환경 속에서 부르는 마부의 노래는 그래서 더 애절하다. 돈 코사크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가 가장 애수 짙은 선율을 들려준다.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던 무렵 레닌이 이끄는 혁명군과 제정 러시아군의 공방은 치열했다. 백군은 후퇴를 거듭하며 패주하여 터키의 수용소에 집결하게 되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향수 속에서도 목청 좋은 병사들을 모아 합창단을 만들었다. 적군과 싸우던 제정 러시아군의 합창단, 돈 코사크 합창단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 후 이들은 그리스와 불가리아를 거쳐 세계 각지를 다니며 연주회를 열었다. 돈 코사크 합창단이 부르는 '종소리는 단조롭게 울리고'가 마음에 와닿는 것은 이들이 겪었던 시대적 불운과 격동의 러시아 근대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작은 종이 단조롭게 울리네/ 길엔 가볍게 먼지가 일고/ 끝없는 들판에/ 마부의 노래가 음울하게 퍼지네.'

패잔병들의 애잔함이 스며든 팔세토(가성) 창법으로 부르는 이 노래는 서정성의 극치를 보여주며 러시아의 대평원으로 우리를 이끈다. 단조로운 방울 소리, 마부의 음울한 노래, 삐걱거리는 트로이카 안에는 피로에 젖어 혼곤한 잠에 빠져드는 사람이 있다.

돈 코사크 합창단과 붉은 군대 합창단은 구성 과정이나 사상적 토대가 정반대다. 붉은 군대 합창단은 오케스트라를 갖춘 대합창단으로 구 소련군의 공식 합창단이었으며, 조형적이고 극적인 예술 효과를 최대한 발휘한다. 최근까지도 국가행사에 초대되어 연주를 했지만, 2016년 시리아로 러시아군을 위문하러 가는 길에 64명 전원이 추락하여 사망했다.

러시아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코사크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전문적인 음악 수업을 받지 않았지만, 패잔한 황제의 군인들이 녹음한 음반은 러시아 민중의 삶과 거친 풍토, 흙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어 지금까지 최고의 명반으로 꼽힌다.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