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동구 평광동 과수원의 사과나무.
♪능금 꽃 향기로운 내 고향 땅은
팔공산 바라보는 해 뜨는 거리
그대와 나 여기서 꿈을 꾸었네
아름답고 정다운 꿈을 꾸었네
둘이서 걸어가는 희망의 거리
능금꽃 피고 지는 사랑의 거리
대구는 내 고향 정다운 내 고향♬
1970년대 대구 사과가 명성을 날리던 시절 길옥윤이 가사와 곡을 만들고 가수 패티김이 부른 대표적인 대구 예찬곡 「능금꽃 피는 고향」이다.
능금은 사과의 다른 이름이다. 대구경북의 사과를 재배하는 과수농업인들이 100여 년 전에 설립한 전문 품목농협이 대구경북능금농협이다.
◆능금나무는 사과나무
능금은 배, 감, 복숭아, 자두와 함께 중요한 옛 과일이었다. 능금은 한문으로 임금(林檎)이다. 임금보다 굵은 개량종을 내(柰)라고 불렀다. 『천자문』에는 '과진이내'(果珍李柰)로 나온다. 과일 중에는 오얏과 큰 능금이 맛있다는 얘기다. 중국에서는 1세기경부터 임금을 재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시대쯤 한반도에 전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니사과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의 고율시에 나오는 「유월 이십일 오랜 비가 홀연히 개 손님과 함께 동산을 거닐며 본 바를 기록하다」(六月二十日 久雨忽晴 與客行園中記所見)에는 살구, 자두 등과 함께 임금이라는 과일도 나오는데 맛에 대한 표현이 아주 구체적이다.
(상략)
오얏은 주홍빛으로 익었구려(朱李倒紅腮·주리도홍시)
나와 성이 같은 게 가장 귀여워(最憐同姓樹·최련동성수)
능금은 구슬같이 주렁주렁 달렸는데(林檎綴珠琲·임금철주배)
자못 맛이 시고도 쓰구나(頗覺味釅苦·파각미엄고)
(하략)
능금에 대한 기록은 고려 숙종 8년(1103년) 중국 송나라 손목이 서장관(書狀官·기록을 맡은 관리) 자격으로 개성에 왔다가 당시 고려의 조정 제도·풍속·어휘 등을 정리한 책인 『계림유사』(鷄林類事)에 "내빈과(柰蘋果)는 임금과 닮았으며 크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이 최초라고 전해진다. 역시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도 "능금·청리·참외·복숭아·배·대추 등은 맛이 약하고 크기가 작다"는 내용이 있다.
능금과 같은 과일로 흔히 알고 있는 사과(沙果)는 어떻게 유래됐을까? 사과는 내의 중국 이름이었다. 조선 전기까지는 능금의 종류를 내(柰)와 임금(林檎)으로 나눴다.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檎(금)은 임금 '금'으로 읽고 속칭 사과라고 한다"라고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벌써 500여 년 전부터 능금과 사과를 혼용했다고 추측된다. 중국어로 사과를 뜻하는 '핑궈'(蘋果)의 잘못 전해진 이름이 사과(沙果)라는 주장도 있고 아삭아삭한 식감 때문에 모래 사(沙)자를 쓴 사과(沙果)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조선 후기 정약용이 쓴 『아언각비』(雅言覺非)에는 "柰(내)란 빈파(蘋婆·사과)인데, 이를 뜻하여 산앵(山櫻·벚)이라고도 한다.(방언으로 내를 사과(沙果)라고 하고 산앵을 벚이라고도 말하는데, 이 말 또 와전돼 '멋'이라고 한다)"고 나온다.
옛 책에 능금나무는 자르지 않고 그대로 두면 키가 10m에 이른다고 한다. 능금은 꽃받침의 밑 부분이 혹처럼 두드러지고 열매의 기부가 부풀어 있다고 한다. 반면 사과는 꽃받침의 밑 부분이 커지지 않고 열매의 아랫부분은 밋밋하다. 또 능금은 사과에 비해 신맛이 강하고 물기가 많으며 크기도 작다고 기록돼 있다.
개화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개량종 사과는 우리말인 능금으로 불렸으나 1970년대부터 사과란 이름으로 점차 통일되고 능금이란 말은 서서히 잊혀 갔다.

사과꽃
◆사과, 기독교의 '선악과'일까
사과는 유럽인들이 즐겨 먹는 과일이다. 동양의 복숭아만큼 전설과 신화가 많은 서양의 사과는 유럽에서 가장 유혹적인 과일이다. 사과에 얽힌 서양의 종교, 특히 기독교와 연관된 이야기가 다양하다.
무엇보다 서양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과일은 기독교의 선악과다.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눈이 열려 선과 악을 알게 될 열매'를 따먹었다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구절이 나오지만 선악과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구약성경 「아가서」 2장 3절에 있는 "젊은이들 사이에 있는 나의 연인은 숲속 나무들 사이의 사과나무 같답니다", 5절 "여러분, 건포도 과자로 내 생기를 돋우고 사과로 내 기운을 북돋아 주셔요"라는 구절을 보면 사과나무는 긍정적으로 묘사돼 있다.
그런데 2세기경 히브리어 구약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오류가 생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의미하는 부분을 사과나무로 쓰게 됐다고 한다. '나쁘다'는 뜻의 형용사 '말루스'(Malus)의 어원 '말룸'(Malum)의 철자 'a'가 단모음 이면 '악'(惡)을 뜻하지만 장모음일 땐 '사과'를 일컫는다. 선악과를 '사과'로 오해했다는 주장이다. 17세기 영국 존 밀턴의 대서사시 『실락원』에서 인간의 원죄와 낙원 상실의 비극을 다루면서 금단의 열매를 사과에 비유한 뒤로는 '선악과=사과'로 못 박다시피 했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종교적 그림에도 하와 옆에 있는 선악과가 사과나무로 그려지게 됐다.
여기서 금단의 열매를 먹는 순간 아담의 목에 사과 한 조각이 걸려서 남성들의 툭 튀어나온 결후(結喉·울대뼈), 즉 '아담의 사과'(Adam's Apple)가 생겼다는 속설도 등장한다.
◆서양 문화가 담긴 사과
그리스 신화에는 이른바 '불화(不和)의 사과'가 나온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최고의 미녀'이자 사랑과 쾌락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에게 선물했던 사과는 결국 트로이를 멸망하게 만든 재앙의 불씨가 됐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두고 간 황금 사과가 예기치 않게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됐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빌헬름 텔의 사과'는 동화, 연극, 음악, 오페라 등 예술 작품의 단골 소재로 유명하다. 활의 명수 빌헬름 텔은 지배자의 명령에 따라 아들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화살로 명중시켜 스위스 독립운동의 시위를 당겼다.

가을에 익어가는 사과.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식물원에는 '뉴턴의 사과나무'가 있다. 과학자 아이작 뉴턴은 눈앞에서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현상을 보고 광대하게 생각하다 중력의 원리를 터득했다.
'세잔의 사과'는 19세기 파리 화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정물화 소재다. 프랑스 화가 폴 세잔은 유독 사과 그림을 많이 그렸다. 정물화 가운데 가장 알려진 작품 「사과와 오렌지」는 무미건조한 주제를 위대한 미술로 승화시켰다는 평이다.
반면 '앨런 튜링의 사과'는 영국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의 비극적 삶을 기리는 상징이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의 암호 해독에 수훈을 세우고 컴퓨터와 인공지능(AI) 연구의 길을 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당시 금기였던 동성애자로 밝혀져 당국의 감시와 치료를 받다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혁신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애플사는 자사의 로고 '베어 먹은 무지개 사과'가 튜링이 먹다 남은 사과를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튜링을 기려서 베어 먹은 사과를 로고로 택한 것은 아니다"라고 공식 발표했을 정도다.

대구에 처음 도입된 서양사과나무 후계목. 대구동산병원 선교박물관 옆에 있다.
◆대구경북의 사과 도입
우리나라에서 사과 재배가 성행한 것은 18세기 초쯤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홍만선이 쓴 『산림경제』(山林經濟)에 능금 재배법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서양 사과나무는 1884년 무렵 선교사들이 관상수로 도입한 품종이다. 대구에서 최초의 서양 사과는 역시 미국인 선교사 애덤스 목사에 의해 1890년대에 도입됐다. 대구 동산병원 선교박물관 옆에 자라던 1세대 서양 사과나무는 죽어 그루터기만 남아 있고 후계목들이 그 곁을 지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홍옥 사과나무.
기후 온난화와 도시의 확장으로 예전 대구의 사과밭은 많이 사라졌지만 팔공산 자락 동구 평광동 일대는 지금도 사과 과수원이 지천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대구시 보호수 '홍옥 사과나무'도 평광동에 있다. 1935년에 심어진 5년생 사과나무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사과나무다.
수령이 90년이 넘는다. 수종 교체가 여러 번 이뤄졌지만 기념으로 남겨 놓았다고 한다. 대구 능금의 전통을 전해주는 홍옥 사과나무의 생명력이 인정돼 대구시 보호수로 지정됐다. 사과나무는 보통 30년, 길어도 50년 정도가 지나면 경제성이 떨어지므로 과수농가에서는 묵은 나무를 베어내 버리고 신품종을 심는 '수종 갱신'을 한다.

◆"사과 하나씩 먹으면 의사가 필요 없다"
어서 이리 오세요.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잘 익은 이 과일을 드셔 보세요!
장미야 시로 노래하면 그만이지만
사과는 깨물어 먹어 봐야 맛을 알지요.
독일 대문호 괴테의 『파우스트』 2부에 나오는 달콤한 유혹의 노래다.
빨갛게 잘 익은 사과는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맛이 새콤달콤해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하루에 사과 하나씩 먹으면 의사를 멀리한다'(An apple a day, keeps the doctor away)는 서양 속담은 사과의 효능을 높이 평가한 말이다.
사과는 우리 몸에 필요한 각종 영양소가 가득하며, 각종 성인병 예방과 피부 미용에도 도움이 된다. 사과를 술, 식초, 주스, 잼 등 다양한 방법으로 가공해서 먹기도 한다. '과수원 집 딸이 예쁘다'는 말이 괜히 생긴 말이 아니라 미용 효과가 그만큼 탁월하다는 뜻이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구름이 논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대지가 숨 쉰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강이 흐른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태양이 불탄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달과 별이 속삭인다
그리고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우리 땀과 사랑이 영생한다
생전에 대구경북에서 활동한 구상 시인의 「한 알의 사과 속에는」을 읽으면 구름과 대지, 태양, 달과 별, 땀과 영생을 담아낸 시인의 혜안을 우러르게 된다. 이는 불가에서 '하나의 티끌에 온 세상이 담겨 있다'는 『화엄경』 「법성게」에 나오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을 떠올리게 한다.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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