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이다

입력 2022-12-01 10:53:33 수정 2022-12-03 07:59:42

로버트 자레츠키 지음, 윤종은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벨기에 출신 화가 Michiel Sweerts가 1652~1654년경 제작한
벨기에 출신 화가 Michiel Sweerts가 1652~1654년경 제작한 '아테네의 역병'.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더불어 고대 그리스의 운명을 바꾼 아테네 대역병. 에티오피아에서 시작해 이집트를 거쳐 그리스 전역에 퍼진 이 역병은 기원전 430년 아테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426년까지 아테네는 수차례에 걸친 역병으로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고, 국가를 이끌던 걸출한 지도자는 물론 중무장 보병과 같은 핵심 전력까지 잃었다.

아이러니는 전쟁을 대비해 주민을 도시에 모아놓은 바람에 전염병이 창궐하기 아주 좋은 조건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재난의 대비가 또 다른 재난의 조건이 된 현실 앞에서, 아테네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사의 틀을 세웠다고 평가받는 투키디데스(기원전 460~400)는 이 전염병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동쪽 어딘가에서 발생한 역병은 유례를 찾을 수 없었다. 무슨 병인지 알 수 없어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도 몰랐다. 갖은 수를 써 봐도 무엇 하나 소용이 없었고, 모두가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투키디데스가 중요하게 생각한 건 '기록'이다. "혹여나 역병이 다시 발생하면 연구자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병의 성질을 요약하고 증상을 설명하고자 한다"며 두통과 갈증, 악취와 고름 같은 증상을 묘사한다. 역병이 아테네 사회 전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룬다. 당시 전염병은 사회 규범을 무너뜨리고 있었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아테네인들은 재산이나 건강 상태, 신분과 관계없이 닥치는 대로 목숨을 앗아가는 역병 앞에서 충격과 절망에 빠졌다. 절망은 곧장 사람들의 저항력을 떨어뜨려 질병의 손쉬운 먹잇감으로 만들며 사망률을 더 높였다. 산 사람들은 신앙심이 깊건 그렇지 않건 매사에 거리낌이 없어졌고, 전에는 남몰래 해야 했던 일을 대놓고 했다. 주인이나 법의 지배가 없는 방종한 상태에서 폭력으로 목숨을 잃을 위험과 끝없는 공포에 시달렸고, 삶은 고독하고 잔인하고 불결하며 짧았다. 죽음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아테네인은 '목숨도 재물도 다 덧없는 것으로 여겼다.

사회 전체를 오염시키는 재난은 시대를 넘어 반복된다. 로마 제국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는 재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누스 역병이란 대재난을 마주해야 했다. 전염병으로 인해 로마에선 다른 사람의 묫자리를 빼앗는 등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역병 때문에 산업이 붕괴되고 세수가 부족해지면서, 황제는 황실의 물건을 경매로 팔아야 할 정도까지 내몰렸다. 이런 전염병 앞에서 황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일기 '명상록'을 통해 그의 생각을 가늠해볼 수 있다. 재위 초엔 제국 한가운데를 휩쓴 역병 속에서, 말년엔 변경을 위협하는 이민족과의 전쟁 속에서 쓴 이 글엔 왕국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 황제의 지혜가 담겨 있다.

역병과 전쟁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는다. 하지만 "마음의 타락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오염으로 변질되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역병"이라는 구절에서, 진짜 재난은 질병 자체가 아니라 질병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거짓된 인식에서 벗어나 충분히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재난에 대처하기는커녕 더 큰 재난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통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신간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이다'는 휴스턴대 역사학과 교수인 지은이가 과거 팬데믹 시대의 고전(古典)을 통해 오늘날 지혜를 구하는 책이다. 투키디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미셸 드 몽테뉴(1553~1592), 알베르 카뮈(1913~1960)가 쓴 책이 대상이다. 카뮈를 제외하곤 모두 전염병을 겪었다. 카뮈는 "이데올로기라는 전염병"이 삶을 위협하는 현실과 싸웠다.

지은이는 팬데믹이 확산되던 2020년 초 친구의 제안으로 요양원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고전 해석을 씨줄로, 요양 보조 경험을 날줄로 삼아 이 책을 썼다. 환자들과 함께 고전을 읽으며 재난 상황을 버텨 낼 힘을 얻었다는 지은이의 일화는, 인문학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300쪽, 1만8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