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들려주는 클래식] <15> 쇼팽의 ‘발라드 1번’

입력 2022-11-21 11:40:50

영화
영화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 ㈜블룸즈베리리소시스리미티드
서영처 계명대 교수
서영처 계명대 교수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쇼팽(1810~1849)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야상곡으로 시작된다. 감독은 영화 전체에 쇼팽의 음악을 배치하여 비극적인 음영과 색채를 부각한다. 영화는 폴란드계 유대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스필만의 실화를 담았다.

이 영화에는 잊지 못할 장면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독일의 패색이 짙어갈 무렵 스필만은 바르샤바의 한 건물에 숨어있었다. 굶주리던 어느 날 용케 통조림 하나를 구해 따려고 애쓰다가 수상한 기척을 느낀 독일 장교에게 발각된다. 지저분한 꼴로 음식을 찾아 헤매는 사람, 하지만 그는 전쟁 전 이름을 날리던 피아니스트였다. 독일 장교는 스필만에게 피아노를 쳐보라고 하고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일생일대의 연주를 시작한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피아노 소리가 울린다. 장중한 서주로 시작되는 '발라드 1번'. 바르샤바가 쇼팽의 근거지이기 때문일까. '발라드 1번'은 영화의 줄거리와 어우러져 한 프레이즈가 끝나기도 전에 벅찬 감정을 던져 준다. 서주는 느리고 무거운 멜로디로 시작하지만 곧바로 몰아치듯 드라마틱한 대비를 들려주며 풍부한 화성과 서정으로 진폭이 큰 감동을 전한다. '발라드 1번'을 듣고 나면 장대한 이야기를 들은 듯 긴장을 놓으며 기분 좋은 피로감을 느낀다.

발라드는 자유로운 형식의 서사적인 음악이다. 쇼팽은 폴란드 시인 아담 미키에비치(Adam Mickiewicz)의 시에 영감을 받아 네 곡의 발라드를 작곡했다. 그의 음악은 대부분 화려함 속에 비극성을 내포한다. 비극성은 그의 음악을 장식적인 기교로 이루어진 센티멘털리즘에 머물게 하지 않고 격조를 지닌 위치로 올려놓는다.

'발라드 1번'을 작곡하던 해는 쇼팽에게 불행한 한 해였다. 비엔나에서 이주해 처음 파리 생활을 시작하였고, 폴란드는 러시아의 침공을 받아 친구들은 독립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조국으로 떠났다. 쇼팽은 불안한 파리 생활과 참전하지 못한 데 대한 복잡한 심경을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영혼의 투쟁으로 그려냈다.

스필만 또한 전장의 한가운데서도 인간 본연의 감성을 비극적이고 아름답게 연주했다. 그의 연주는 독일 장교의 마음을 서서히 무장해제 시켰다. '발라드 1번'은 고통의 격랑과 절망, 망설임과 놀람이 동시에 담겨 있어 전쟁에 지친 심신을 위로하고 음악 본연의 아름다움을 성취했다. 또한 그들이 처한 상황 속으로 파고 들어가 풍부한 음영과 심정에 밀어닥치는 파고를 만들어내며 호소력을 발휘했다.

인간의 영혼을 꿰뚫고 훑어내리는 것은 이성이나 논리가 아니라 감성이다. 만일 이 시간 이 장소에 지성이 개입했더라면? 쇼팽이 아닌 바흐의 정직함이나 베토벤의 이념을 연주했더라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쇼팽의 음악은 이데올로기를 배제하고 소리와 음악 자체에 집중하지만 실은 더 강력한 무언가를 듣는 사람의 심정으로 불러온다.

피아노가 매개가 되어 두 사람의 운명은 뒤바뀐다. 스필만은 살아남아 피아니스트로서 활동을 계속해나가고 그를 살려준 독일 장교는 소련의 수용소에서 생을 마친다.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