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칼럼] 검은 백조, 회색 백조

입력 2022-11-06 21:44:52

김해용 논설주간
김해용 논설주간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서 156명이 사람들에 끼어 숨지고 197명이 다쳤다. 5평(18㎡) 남짓한 공간에 350여 명이 몰려 질식한 것이다. 꽃다운 생명들이 사람들 틈에 몸이 끼어 유명을 달리했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저민다.

사고가 난 이태원 내리막 골목에는 1천~1천200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해당 골목 전체 면적이 180㎡(54평)이니 1㎡당 5.6~6.7명이 있었다. 1㎡당 6명이 몰리면 압사 사고 위험성이 생긴다는 조건에 부합한 상황이었다. 이번 참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인구 과밀국인 우리나라에서 군중 밀집 위험성에 대한 둔감함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만원 지하철, 축제장, 스포츠 경기장 등에서 인파가 수시로 몰리니, 사람에 치여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공직자들은 그런 안일함에 젖어 책무를 방기했다. 이태원에 10만여 인파가 몰렸는데 용산경찰서, 서울지방경찰청, 용산구청, 서울시청에 압사 사고 경각심을 가진 고위 공무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 자체가 경악할 지경이다. 사전 대비는커녕 참사 당일 11건의 112 시민 신고가 들어왔음에도 경찰 수뇌부는 아무 조치를 하지 않았다. 용산구청도 안전 대책 회의 같은 것을 열 생각을 안 했다.

물 위에 우아하게 떠있는 백조(고니·Swan)가 물갈퀴를 바쁘게 젓는다는 말이 있다. 백조가 물갈퀴를 늘 바쁘게 젓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비유는 공직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태도 안 나지만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직자들이 제 책무를 다해야 함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검은 백조(Black Swan) 이론'을 떠올린다. 검은 백조는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호주에 가면 검은색 고니가 있다. 유럽 사람들은 '고니=하얀 새'라고 오랫동안 믿었다. 검은색 고니가 호주에서 발견되자 유럽 생물학계는 충격에 빠졌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사건이 실제로 발생하면 큰 후폭풍이 생기며 사후 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사고는 필연이었다'는 과장이 일어난다는 게 검은 백조 이론의 핵심이다.

이태원 참사는 '검은 백조'에 해당할까. 피할 수는 없었을까. 나는 이태원 참사가 검은 백조까지는 아니더라도 '회색 백조'(Grey Swan)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회색 백조 이론'은 발생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고 일반인들도 알고 있지만 그 가능성을 거의 무시하고 방심하고 지내다가 갑자기 발생해서 큰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를 일컫는 용어다.

대도시에서는 군중 밀집에 따른 압사 사고 위험이 상존한다. 이태원 참사도 전날부터 경찰서에 신고가 많이 접수되는 등 전조(前兆)가 있었다. 2020년 서울연구원은 '신종 대형 도시 재난 전망과 정책 방향' 보고서를 통해 서울에서 장래 관심을 둬야 할 대형 도시 재난 중 하나로 '압사 사고'를 꼽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태원 참사는 공직자들의 안일함이 빚어낸 공공 부문의 실패다. 우리는 공무원들이 있어야 할 곳에 없고, 제 일을 하지 않으면 국민들이 어떠한 불행에 빠지는지 뼈 시리게 경험하고 있다. 어쩌면 정치와 행정은 회색 백조 등장에 대비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기본 역할은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켜주는 것이다. 회색 백조에 대비한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그래도 해야 한다. 그게 공직자의 숙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