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미 디자이너의 세계 명품 이야기]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

입력 2022-10-24 14:18:09 수정 2022-10-24 17:58:27

뱀부백·재키백…100년 역사 명품
"It's so Gucci" MZ세대까지 홀려
창립자 구찌오 '홀스빗 로퍼' 개발…배우 알랭드롱 신어서 인기 정점

구찌 다이애나 백-미니 오스트리치 토트백
구찌 다이애나 백-미니 오스트리치 토트백

현재 케링(Kering S.A.) 그룹 소속의 자회사이다. 구찌는 2015년 새로운 크레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를 영입하여 디자인의 큰 혁신과 변화를 통해 가장 핫한 명품 브랜드로 주목 받고 있다. 2019년 브랜드 디렉토리 기준으로 3년 연속 명품 브랜드 가치 순위 1를 차지했으며 MZ세대로부터 큰 인기를 끌면서 멋지고 화려하다는 의미인 'It's so Gucci'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명품 브랜드 구찌에 대하여 알아보자.

◆ 구찌 브랜드의 설립 배경

구찌의 창립자 구찌오 구찌(Guccio Gucci)는 1881년, 3월 26일 이탈리아 투스카니의 피렌체에서 대대로 밀짚모자를 만들어 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업을 물려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고 밀짚모자를 만드는 일은 앞으로 사양 산업이라 판단하여 1897년 당시 전 세계의 부호들이 모이고 사교계의 중심이었던 런던의 사보이 호텔로 갔다. 이곳에서 벨보이와 허드렛일을 하면서 타고난 눈썰미로 귀족과 상류층의 문화를 익히기 시작했다.

부유한 상류층의 가죽으로 만든 여행 트렁크에 깊은 인상을 받은 구찌오는 1902년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가 '프란지' 라는 가죽 제조업체에서 가죽 공방 기술을 배우며 재봉사인 아이다 칼벨리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구찌오 구찌(우)와 그의 부모(좌)(출처:wwd.com).구찌오 구찌의 첫 직장 1893년, 런던 사보이 호텔(출처:moneyweek.com)
구찌오 구찌(우)와 그의 부모(좌)(출처:wwd.com).구찌오 구찌의 첫 직장 1893년, 런던 사보이 호텔(출처:moneyweek.com)

1906년, 피렌체에 작은 마구상을 오픈하여 승마용품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1921년, 이탈리아 피렌체 비냐 누오바 거리에 '구찌'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첫 번째 가죽제품 전문매장을 설립하고 연이어 같은 해 빠리오네 거리에 두 번째 매장을 내어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장인 기술을 결합하여 핸드백, 여행가방, 장갑 및 부츠와 같은 승마 용품을 중심으로 한 가죽 제품을 판매하면서 가죽의 수선 및 유지 보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손님들의 신뢰를 얻기 시작하였다.

구찌오는 승마용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932년, 재갈 고리(말을 제어하기 위해 입에 물리는 가느다란 막대)에서 영감을 받아 홀스빗 로퍼를 처음 개발하여 구찌 슈즈를 상징하는 아이템이 되어 섹시한 남성의 필수품이 되었다.

왼쪽부터 알도, 바스코, 로돌프. 구찌 패션사업에 함께 참여한 세 아들.(출처:fashionelite.com)
왼쪽부터 알도, 바스코, 로돌프. 구찌 패션사업에 함께 참여한 세 아들.(출처:fashionelite.com)

끈을 묶지 않고 신을 수 있는 로퍼는 1953년, 뉴욕현대미술관에 전시될 만큼 훌륭한 디자인을 자랑하였고 당대 최고의 스타인 클라크 케이블, 존웨인, 프란시스코 코플라 감독 등 유명한 셀럽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영화배우 알랭드롱이 나폴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 <태양은 가득히,1960년>에서 신발을 신고 나오자 그 인기는 정점을 찍었다.

1938년 구찌오는 사업을 확장하여 로마에 지점을 오픈하여 그의 아들들을 고용하여 가족경영체제의 사업을 시작하였고, 1953년, 구찌오가 세상을 떠나기 2주 전 뉴욕 58번가 사보이플라자호텔에 첫 해외 매장을 오픈하였고, 이탈리아 브랜드로서는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역사적인 공을 세웠다.

또한 미국 변호사의 도움으로 '구찌' 상표에 대한 권리를 소유한 Gucci Shops Inc.를 설립했다.알도는 탁월한 비지니스 감각으로 1960년대 후반에 아시아 시장을 공략해 도쿄와 홍콩 등에 매장을 내며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여 구찌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구찌의 시그니처 아이템 뱀부백, 2022년 상품.(출처:gucci.com)
구찌의 시그니처 아이템 뱀부백, 2022년 상품.(출처:gucci.com)

◆ 위기를 기회로, 구찌의 시그니처 아이템 뱀부백과 재키백의 탄생

1940년 제 2차 세계대전으로 당시 모든 물자가 전쟁에 동원되었고, 국제연맹이 이탈리아에 수출 금지령을 내려 가죽과 금속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졌다. 첫째 아들 알도는 궁여지책으로 가죽대신 나폴리에서 생산되는 대마, 황마, 아마, 리넨, 대나무 등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소재를 사용하였고 가죽 대신 대마에 다이아몬드 패턴을 수놓은 '디아만테(Diamante Diamond)' 캔버스를 개발했다.

크고 작은 마름모꼴의 디아만테 캔버스로 여행 가방과 여성용 핸드백을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가는 미군들은 아내와 연인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구찌 매장을 찾았다. 이때부터 피렌체 구찌 매장은 세계 유명 인사나 관광객들에게 필수 코스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구찌의 시그니처 디아만테 캔버스(출처:instiz.net)와 디아만테 캔버스백 (출처:blissminse.tistory.com)
구찌의 시그니처 디아만테 캔버스(출처:instiz.net)와 디아만테 캔버스백 (출처:blissminse.tistory.com)

전쟁에서 패하고 경제는 위기의 상황이었다. 가죽 업체들이 줄줄이 도산하면서 좋은 가죽을 구하는 것이 힘들어지자 알도는 가죽을 대신할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안감으로나 쓰였던 돼지가죽은 두께가 얇고 부드러워 잘 늘어나고 모공이 그대로 드러났다. 구멍이 보이는 그대로를 살린 돼지가죽을 새로운 소재로 사용했다.

돼지가죽과 함께 대나무를 열처리하여 구부린 반원 형태의 손잡이를 만들어 새로운 가방인 뱀부 백(Bamboo bag)이 탄생되었다. 1947년에 선보인 뱀부 백은 구찌 역사를 통틀어 가장 독보적인 인기를 누린 베스트셀링 아이템이다.

대나무 손잡이로 제작된 뱀부 백은 지금도 피렌체 공방에서 핸드메이드로 제작되고 있으며 뱀부 백 하나를 제작하기 위해서 종 13시간을 투자하여 만들고 있다. 대나무에서 영감을 받은 패턴은 머리 스카프에서 시계 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에도 사용되며 구찌의 대표적인 디자인 요소가 됐다.

1961년에는 알도는 안장을 묶을 때 사용하는 캔버스 띠에서 영감을 얻어 초록-빨강-초록(GRG), 파랑-빨강-파랑(BRB) 색을 배열한 '더 웹(The Web)'과 창립자 아버지의 이름을 딴 더블 GG 로고를 만들었다. 더 웹과 GG 로고는 구찌 브랜드를 나타내는 표식으로 쓰였고, 같은 해 GG 로고를 캔버스 소재로 개발하여 '재키(Jackie) 백'을 제작하였다.

구찌 다이애나 백
구찌 다이애나 백

구찌를 대표 아이콘 백 중 하나인 재키 백은 1950년대에 처음 등장했는데 원래는 '콘스탄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다 패션 아이콘인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들고 다니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구찌는 그녀를 위한 헌정으로 백의 이름을 '재키' 또는 '재키 오'로 바꿨다.

1966년 모나코 왕비인 그레이스 켈리가 밀라노 구찌 매장을 방문하여 친구의 결혼선물로 스카프를 찾았지만 당시 구찌는 스카프를 만들지 않았다. 로돌프는 특별한 고객을 위하여 비토리오 아코르네로 디자이너에게 부탁해 이탈리아 사계절을 대표하는 꽃, 열매, 곤충을 표현한 '플로라' 패턴이 탄생됐다. 1979년, 구찌 액세서리 컬렉션을 론칭하고 이후 향수 사업과 라이센스 사업을 시작하였다.

구찌의 가족 계승도 및 지분(출처:youtube.com)
구찌의 가족 계승도 및 지분(출처:youtube.com)

◆ 구찌 가문, 왕자의 난과 청부살인

1953년 창립자인 구찌오 구찌가 72세로 세상을 떠나고, 아들 중 알도와 로돌프가 각각 50%씩 경영권을 갖게 된다. 로돌프는 사업보다는 한때 배우로 활동하며 연기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곧 배우생활을 끝내고 가족 경영에 참여했는데, 이것이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1982년, 구찌는 가족 경영진의 결정을 통해 주식회사가 되었고 1년 뒤, 로돌프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마우리초가 경영권을 물려받자 알도의 차남 파올로가 앙심을 품었다. 파올로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저렴한 브랜드 '파올로 구찌(Paulo Gucci)'라는 상표를 만들어 저렴한 제품에 구찌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구찌 브랜드의 가치를 추락시켰다. 화가 난 알도가 아들을 해고하자 아들은 아버지를 탈세혐의로 고발하여 법정 구속이 되며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블 G 캔버스(좌), 구찌 재키백(중간)과 더블 G 캔버스 라지 더플백(우).(출처:gucci.com)
블 G 캔버스(좌), 구찌 재키백(중간)과 더블 G 캔버스 라지 더플백(우).(출처:gucci.com)

1993년, 마우리초는 자신이 보유한 50퍼센트 주식 지분을 인베스트코라는 회사에 매각했다. 인베스트코는 이미 1987년에서 1989년 사이, 구찌 후손들로부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회사 지분을 모아 50퍼센트를 인수한 상태였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가족경영 브랜드였던 구찌는 이렇게 거대 기업에 편입되었다.

1995년, 3월 27일 마우리초가 청부업자의 총에 맞아 사망했고, 추적 끝에 이를 사주한 것은 전처 파트리치아 레지아니였다. 그녀는 1998년, 법정에서 29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18년을 복역하고 지난 2016년, 가석방되었다.

구찌 X 아디다스 콜라보레이션(출처:gucci.com)
구찌 X 아디다스 콜라보레이션(출처:gucci.com)

◆ 구찌의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도미니코 데 솔레가 CEO가 되면서 1994년에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톰 포드가 영입되어 과감한 행보를 보여 주면서 벼랑 끝에 서 있던 구찌를 구해내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99년 PPR그룹과 제휴를 맺어 독립 브랜드가 아닌 럭셔리 기업의 소속이 되어 PPR그룹에 들어가면서 2004년 7월, 결국 톰 포드와 도미니크 데 솔레는 경영진과의 마찰로 구찌를 떠났다.

프리다 지아니니는 2002년, 펜디에서 구찌로 합류하여 액세서리 라인의 디렉터로 활동하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2006년, 구찌 컬렉션의 전체를 총괄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알레산드로 미켈레 구찌 크레이티브 디렉터(출처:artinsight.co.kr)
알레산드로 미켈레 구찌 크레이티브 디렉터(출처:artinsight.co.kr)

구찌의 CEO 마르코 비자리(출처: vogue.co.uk)
구찌의 CEO 마르코 비자리(출처: vogue.co.uk)

◆ 화려한 구찌의 부활, 알레산드로 미켈레

로마 출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2002년 구치의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입사하여 2011년 프리다 지아니니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다 2015년, 1월 구찌의 크레이티브 디렉터로 선정되었다. 구찌에서 12년 넘게 일한 후 정상에 올랐다.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기존의 올드하고 식상한 구찌의 이미지를 자유로운 젊은 세대들의 감성으로 표현하여 혁신적이면서 새로운 느낌으로 탈바꿈했다. 동물과 꽃 모티브로 표현된 남성용 주얼리와 시계, 컬러풀한 스톤, 디테일은 구찌의 세련미 넘치는 미학을 재구성하였다. 그로 인해 MZ세대의 젊은 고객들이 늘기 시작하면서 스트릿, 힙한 패션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최근 아디다스와 콜라보를 통해 스포츠 브랜드와 명품 브랜드의 힙한 감성을 잘 표현하였다.

현재, 구찌의 글로벌 앰버서더로 신민아, 이정재, 카이, 아이유가 활동 중이다.

박연미 디자이너 명장,디모먼트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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