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하나를 얻었다
오날 걸음은 잘 왔구나
대장부 한번 걸음에
화초장이 하나가 생겼구나
(개울을 건너다 이름을 잊어 버렸다)
초장화 아아
장화초 어어
웠다 이것을 잊었다
아이고 이것이 무엇이냐
갑갑허여서 내가 죽겄구나♪
판소리 『흥보가』(興甫歌)에서 놀보(놀부)가 화초장(花草欌)을 지고 가면서 부르는 소리 「화초장타령」이다. 놀부가 흥부 집에서 뺏듯이 얻어간 화초장을 외우면서 개울을 건너다 이름을 잊어 버린 장면이 해학적이다. 여기에 나오는 화초장은 바로 모과나무로 만든 옷장이다. 모과나무 목재는 갈색이나 붉고 치밀하며 광택이 있고 아름다워 장롱과 목기(木器) 등의 재료로 쓰였다. 모과나무 장롱은 자단(紫檀)으로 만든 진품 화류장 대신 쓰이는 '짝퉁 화류장'인 셈이다.

◆모과에 놀라는 몇 가지
모과나무는 고운 꽃에 비해 울퉁불퉁 못생긴 열매가 달려서 놀라고, 열매의 좋은 향기에 비해 맛은 시고 떫어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아 놀라고, 볼품없는 나무 외관이나 열매에 비해 사람에게 이로운 약재 등 쓰임새에 놀란다.
모과나무는 4월 중순에 연한 홍색의 꽃이 수줍은 듯이 핀다. 장미과의 꽃답게 다섯 장의 분홍색 꽃잎이 수더분하고 보기에 따라 앙증맞다. 모과나무를 정원수나 관상용으로 많이 심지만, 나무 덩치에 비해 작은 꽃을 눈여겨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가지에 듬성듬성 하나씩 달리는 꽃은 사람들의 눈에 확 띄는 강렬한 색깔이 아닌 데다 그나마 상당수는 나뭇잎에 가려져 있다. 또 개화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아 무심코 보는 사람에게는 꽃의 존재감을 자랑할 틈이 없다.
이런 꽃과 달리 가을에 노랗게 익는 열매는 잎이 다 떨어진 10월 하순이면 멀리서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모습이 적나라하다. 주렁주렁 매달린 열매 모양이 참외 같다고 하여 '목과(木瓜)'라는 한자 이름을 얻었다. 목과에서 우리말 모과로 변했다.
중국이 원산지인 모과나무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고려의 문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나오기 때문이다.
"늦도록 마시다가 잠깐 쉬게 되니 오직 서너 사람만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시게 되었다. 그 후 밤중이 되어 오래 앉아 있자 몸이 피로하여 졸음이 눈을 가리곤 했다. 그러자 스님이 나가서 금귤(金橘)·모과(木瓜)·홍시(紅柿)를 가지고 와서 손들을 대접하는데, 한 번 씹자마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졸음이 벌써 어디로 가버렸다." 모과 맛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한 번 씹었는데 졸음이 달아나 버렸겠나.
◆무열수(武熱樹)를 아시나요
모과나무는 주로 중부 이남지역의 집주변과 빈터, 도시의 공원과 정원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모과나무 천연기념물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연제리 오송생명과학국가산업단지의 '木瓜공원' 안에 수령 약 500년으로 추정되는 모과나무가 유일하다.

대구경북에는 조경용으로 심어진 모과나무는 흔하지만,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는 보기 드물다. 경북 칠곡군 동명면 천년고찰 도덕암의 수령 800년으로 추정되는 모과나무와 대구시 만촌동 무열대(武熱臺)에 있는 나이 500살쯤의 모과나무,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 고령도서관 뜰의 390년 묵은 모과나무, 포항시 청하면 서정리 제당의 330년 된 모과나무가 대표적이다.
도덕암의 모과나무는 고려시대 혜거국사가 팔공산 자락 도덕산에 암자를 창건하면서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전문가들은 나무의 나이를 800년 정도로 추정하는데, 모과나무 중에서는 국내 최고령에 속한다. 높이 10미터, 밑동 둘레 4미터에 이르지만 큰 줄기는 없고 밑동에서 자란 큰 가지 4개에 열린 모과가 가을 햇살을 받아 익어가고 있다.
대구 수성구 만촌동 무열대에 약 500년 된 모과나무는 높이 5m 밑동 둘레가 4m 넘는 노거수다. 북구 팔달동 일명 장태실에 있던 나무를 주민들이 희사해 1979년 11월 초에 현재의 자리로 이식됐고, 1992년 7월부터 대구시 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다. 큰 줄기는 썩어서 여기저기 상처를 메운 외과 수술 흔적이 있고 밑동에서 올라온 맹아가 자라 큰 가지를 이루고 있다.
500년간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 꿋꿋이 자라온 끈기와 기상이 부대의 기백(氣魄)과 일맥상통하여 '무열수(武熱樹)'로 명명했다고 한다. 부대 안에 위치해서 시민들이 보려면 몇 가지 절차를 거쳐야 하는 점이 번거롭지만 장병들이 나무를 잘 관리한 덕분에 올해도 모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고령도서관 마당 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모과나무는 조선 현종 때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 고령 동헌이 있던 곳이라서 가끔 죄인들의 형벌도 집행됐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 후기 사형수들의 교수목으로 이용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포항시 청하면 서정리 자연마을인 '모과지이' 제당에 자리 잡고 있는 당산(堂山)나무도 모과나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수령이 290년이니 지금은 300년이 족히 넘었다. 예전에 나무 아래에 샘이 있었는데 '모과나무 아래 있는 샘'이라고 목과정(木瓜井)으로 불렸으며 동네 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고 한다.
◆모과나무 아래 서면
옛날 할머니들은 손주들이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역설적으로 못생긴 모과에 비유했다. 유아사망률이 높았던 시절에는 잘생기고 못생기고를 따지는 일은 뒷전이고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었다. 또 잘생기고 귀엽다고 하면 병마와 해코지당할지도 모른다는 어른들의 노파심이 손주들을 '모과 보듯이' 대우했다.
안동 출신 유안진 시인의 작품 「모과나무 아래 서면」에 정겨운 할머니들의 바람이 녹아 있다.
모과나무 아래 서면
쪽진머리 서리 허연 할머니가 보인다
할머니의 가래 섞인 동요가 들려온다
'울퉁불퉁 모개야
아무따나 크거라'
할머니를 따라 배운 어머니의 동요
시인 나를 키운 자장가가 들려온다 (이하 생략)
'아무따나' 큰 모과를 보고 시인은 애틋한 시를 짓는 데 비해 앞에 나온 『흥보가』에는 놀부의 못된 심사를 '모과나무의 아들' 즉 모과라고 직설했다.
"놀보 심사를 볼작시면 초상난 데 춤추기, 불붙는 데 부채질하기…… 심사가 모과나무의 아들이라."
약간 삐뚤어지고 이지러진 모과 생김새가 도리어 재미와 해학을 불러오게 만들었다. 속담의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 역시 못난 행동를 풍자할 때 쓰인다. 물론 미의 기준이 사람의 개성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어느 한 군데도 예쁜 구석이 없을 때 우스개 삼아 애먼 모과나 호박을 소환한다.

◆모과 향기의 진한 여운
가을이 한창 무르익으면 노란 모과는 달콤한 향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예전에 방향제가 그리 흔하지 않던 시절 승용차 안이나 방안에 두고서 그 향을 즐겼다. 그뿐만 아니라 차를 만들거나 술을 담가 향과 맛을 두고두고 즐겼다.
사실 모과는 썩으면서 달콤한 방향물질을 내뿜는다. 열매를 먹고 씨앗을 퍼뜨려 줄 동물을 유혹하기 위한 모과의 종족 보존 전략이다. 시간이 지나면 향을 내는 정유 성분이 밖으로 나오면서 표면이 끈적거리고 향이 더 짙어진다.
모과가 향기를 머금고 영글어가는 이 가을에 읽으면 더 공감할 수 있는 자성록(自省錄) 같은 시가 정호승의 「모과」다. "썩어가는 모과향은 모과의 영혼의 향기다"는 시인의 말에는 "육신은 늙어가도 내 영혼만은 시의 향기로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하는" 간절함이 깊게 배어 있다.
가을 창가에 노란 모과를 두고 바라보는 일이
내 인생의 가을이 가장 아름다울 때였다
가을이 깊어가자 시꺼멓게 썩어가는 모과를 보며
내 인생도 차차 썩어가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모과의 고요한 침묵을 보며
나도 조용히 침묵하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고통을 견디는 모과의 인내를 보며
나도 고통을 견디는 인내의 힘을 생각했다
모과는 썩어가면서도 침묵의 향기가 더 향기로웠다
나는 썩어갈수록 더 더러운 분노의 냄새가 났다
가을이 끝나고 창가에 첫눈이 올 무렵
모과 향기가 가장 향기로울 때
내 인생에서는 악취가 났다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 2022)>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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