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학교] 신명고, 영남 최초 여성교육기관서 비롯… 세상의 '빛과 소금'을 꿈꾸다

입력 2022-09-18 14:12:59 수정 2022-09-18 19:12:02

〈10편〉 신명고, 남존여비 유교 사회 속 꽃 피운 영남 최초 여성교육기관에 뿌리
대구 3·1운동 당시 13살 소녀도 허리에 수건 동여매고 만세운동 참여
헬렌 켈러가 직접 방문해 강연 개최, "'달란트' 살려 아름다운 작품이 돼라"
소리 계몽 통해 신여성 배출… 현재도 대구 유일 '음악중점학교'로 활약 중

신명고등학교 전경. 대구시교육청 제공
신명고등학교 전경. 대구시교육청 제공

인류 역사 속에서 학교는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여성이 학교 문턱을 넘기 시작한 역사는 상대적으로 짧다. 우리나라에선 다행히 남성과 여성의 근대교육이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으나, 아직 유교 사상이 지배적이던 때라 여성 교육에 대한 고까운 시선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어려움을 이겨내고서,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온 신명고등학교를 소개한다.

1913년 당시 신명여자중학교 본관 건물. 대구시교육청 제공
1913년 당시 신명여자중학교 본관 건물. 대구시교육청 제공
1935년 신명여자학교 학생들이 화학실험을 하고 있는 모습. 대구시교육청 제공
1935년 신명여자학교 학생들이 화학실험을 하고 있는 모습. 대구시교육청 제공

◆'바느질반'에서 영남 최초 여성교육기관으로

신명고의 뿌리는 영남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었던 '신명여자소학교'와 맞닿아 있다.

대구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이자 브루엔(Bruen, 부해리) 선교사의 부인이었던 마르타 스콧 브루엔(Martha Scott Bruen, 부마태)은 '기독 정신 하에 한국 여성에게 신교육을 가르친다'는 생각으로 대구 선교지부 내 1902년 5월 10일 '신명여자소학교'를 설립했다.

마르타 스콧 브루엔 선교사. 대구시교육청 제공
마르타 스콧 브루엔 선교사. 대구시교육청 제공

교명인 '신명'의 '신(信)'은 '믿음의 토대 위에 학교를 세운다'는 것을, '명(明)'은 '빛'을 뜻한다. 합쳐서 '어둠을 깨트리는 학문의 횃불'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마르타 선교사는 설립 당시 선교 사업의 하나로 소녀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던 바느질반을 인수했다. 이 바느질반에서 배우고 있던 학생들은 마르타 선교사보다 5년 앞서 대구에 도착한 의료 선교사인 존슨(Johnson, 장인차) 의사의 부인인 에디스 파커(Edith Parker)가 집집마다 방문해 모집한 소녀들이었다.

바느질 이외에 한글, 노래, 성경 요절 등에 대한 교육도 이뤄졌음에도 '바느질반'이라고 부른 이유는, 당시 조선에선 여성 교육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바느질을 가르쳐준다는 것이 그나마 학생 모집에 좋은 명분이 됐기 때문이다.

신명여자소학교는 1907년 3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당시 지역엔 여학생들을 위한 상급 학교가 없어 진학을 하려면 서울의 이화여학교 또는 부산의 일신여학교 등 다른 지역으로 떠나야 했다. 이에 마르타 선교사는 남산정 동산에 있는 가옥 한 동을 가교사로 삼아 상급 학교인 '신명여자중학교'를 1907년 10월 15일 설립했다. 12명의 학생을 모집해 같은 해 10월 23일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초창기 신명 학교 교복. 대구시교육청 제공
초창기 신명 학교 교복. 대구시교육청 제공

신명여중은 시대 상황에 따라 신명여자학교, 대구남산고등여학교, 신명여고와 성명여중 등 여러 교명을 거쳐오다 2004년 남녀 공학이 되면서 지금의 '신명고등학교'가 됐다. 교명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과 달리 설립 당시부터 현재까지 중구 동산동 현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 1913년 벽돌조 2층 건물인 본관이 완성되기까지 그 과정에서 당시 유교적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본관 신축 소식이 퍼지자 일부 지역민은 여성이 양관(서양식으로 지은 집)에서 교육을 받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험담을 하고 다녔다. 이는 단순 불만에 그치지 않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신명여중 본관이 동향(東向)으로 세워져 정면으로 대구 거리를 보게 된다면 양기를 혼자만 받아 대구의 명맥은 끊어지게 될 것'이라는 여론으로까지 번졌다.

'신명100년사'에 따르면 당시 대구시장은 이러한 여론을 선교회에 통지해 고려해줄 것을 요청했고, 결국 본관 방향은 남쪽으로 잡히게 됐다고 한다.

이러한 시대적 어려움 속에서도 신명여중 학생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교훈 아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길 꿈꾸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대구 3·8 독립만세운동 당시 사진. 대구시교육청 제공
대구 3·8 독립만세운동 당시 사진. 대구시교육청 제공

◆나라 위해 담 넘은 학생들, 국경을 넘은 가르침 받다

정의와 민족 각성에 중점을 뒀던 초창기 교육 이념은 신명여자학교 시절 발생한 3·8만세 운동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1919년 서울에서 시작된 3·1 운동이 대구에선 3월 8일에 일어났다.

이날 신명학교의 재학생, 졸업생, 교사들은 거리로 뛰어나가 계성과 대구고보의 학생, 성서학당의 수강생,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와 신정교회(현 서문교회)의 교인 등 1천여 명의 시민들과 합세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 당일 신명학교의 수업은 어학, 지지(지리학의 한 분야), 국어, 동물 등 네 시간이었다. 수업을 마칠 무렵 이선애 학생을 필두로, 위 아래 흰 옷 차림에 수건을 허리에 동여맨 수많은 학생들이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북쪽 토담을 넘었다. 그러다 30명쯤 담을 넘었을 때 학교 주위를 돌고 있던 경찰에게 발각돼 나머지 학생들은 서쪽 담을 넘었다.

이후 사복 형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신명학교 학생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담을 넘은 학생들은 각자 현재 섬유회관 맞은편에 있던 민가 곳곳에 숨어 있다가 장터나 남성정파출소 앞에서 시위대에 합류했다. 그러나 신명학교 학생들이 달성군청 앞에 도착했을 때, 일본의 경찰·헌병·군인들로부터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하고 거의 전원이 구속되고 말았다.

신명100년사에 따르면, 이날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졸업생을 포함한 전교생 약 50명으로, 이 중엔 13살에 불과한 어린 소녀들도 있었다고 한다.

헬렌 켈러 여사. 대구시교육청 제공
헬렌 켈러 여사. 대구시교육청 제공

한 차례 아픔을 겪은 이후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던 신명학교에 따뜻한 위로를 선사한 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삼중고의 장애를 가졌음에도 장애인 인권, 사회주의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던 미국의 사회 운동가, 헬렌 켈러(Helen Keller) 여사였다.

헬렌 켈러 여사는 시각 장애 아동도 사회의 유용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일본을 거쳐 부산, 대구, 서울, 평양 등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대구에 도착한 헬렌 켈러 여사는 1937년 6월 12일 신명학교를 방문해 강연을 진행했다. 전교생 167명은 폴라드 제3대 교장의 사택 옆 잔디밭에 앉아 헬렌 켈러 여사의 연설을 들었고, 헬렌 켈러 여사의 비서인 포리 톰슨 여사와 폴라드 교장이 통역을 했다고 한다. 이때 헬렌 켈러 여사는 "미래 코리아의 역사를 어깨에 짊어질 신명의 딸들이여! 꿈을 가져라. 하나님이 택한 딸들로 받은 '달란트'(talent, 재능)를 최대한 살려 아름다운 작품이 돼라"고 역설했다.

신명학교 29회 졸업생인 고(故) 신연식 전 계명대 교수는 학생일 때 이 연설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1933년 신명찬양대 모습. 대구시교육청 제공
1933년 신명찬양대 모습. 대구시교육청 제공
지난 7월 청라 윈드 오케스트라 캠프에 참여한 신명고 학생들의 모습. 대구시교육청 제공
지난 7월 청라 윈드 오케스트라 캠프에 참여한 신명고 학생들의 모습. 대구시교육청 제공
지난 6월 열린 향상음악회에서 신명고 학생이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대구시교육청 제공
지난 6월 열린 향상음악회에서 신명고 학생이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대구시교육청 제공

◆신명의 눈부신 음악적 '달란트', 현재까지 이어져

신명학교엔 일찍이 남다른 '달란트'를 가진 학생들이 많았는데, 특히 음악적 재능이 눈에 띈다.

대구 지역 음악은 1901년 선교사들이 고향인 미국에서 달성군 화원읍에 있는 사문진 나루터를 통해 들여온 '대구의 두 번째 피아노'를 신명학교에 기증하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대구의 첫 번째, 나아가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는 대구 종로에 살던 사이드 보텀 선교사가 가져왔다.

신명학교는 1920년대 후반 활약한 영남 지역 최초의 소프라노 추애경을 비롯한 많은 음악가를 배출했고, 1924년 '신명합창단'을 모태로 대구 최초 혼성합창단을 창단하는 등 대구 음악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이러한 전통은 현재의 신명고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명고는 지난 2014년부터 대구에서 유일하게 교육부와 대구시교육청으로부터 '음악중점학교'로 지정을 받아 한 학년에 한 개 학급씩 음악진로 집중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위해 진로 맞춤식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음악적 역량 강화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음악중점과정은 인문학적 소양에 예술적 감수성을 겸비한 통합적 음악인을 키운다.

음악이론, 음악사, 시창(악보를 보고 노래를 부르는 방법)·청음(음악을 듣고 리듬이나 박자 등을 분간해 악보에 옮겨 쓰는 것), 합주 등 음악전문교과를 3년간 50단위로 이수하게 된다. 국외 학위를 취득하거나 학생 지도 경험이 풍부한 전공 실기 강사들의 개인 맞춤형 교육을 받으며 전문적으로 실기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아울러 교내에 음악연습실을 최신식으로 구축해 전공수업과 방과후 연습을 실시하고 있으며, 지역사회 공헌 프로그램과 외부 향상음악회, 오케스트라 캠프 등 음악 관련 특색있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체계적인 과정과 다양한 음악 관련 활동이 빛을 발해 지난 6년간 음악중점과정을 졸업하는 학생 100%가 모두 자신이 원하는 음악 전공 대학 진학에 성공했다.

황진길 신명고 교장. 대구시교육청 제공
황진길 신명고 교장. 대구시교육청 제공

황진길 신명고 교장은 "우리 학교는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전인적 인간교육과 구국애민정신을 바탕으로 지금껏 5만2천 명의 동문을 배출해 세상을 밝히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교훈을 바탕으로 미래 사회의 핵심인 공감과 소통 역량을 키우는 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